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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중] 그래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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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0건 조회 934회 작성일 21-11-23 10:02

진행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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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무가와 인백기천

 

마산의 신마산 월영광장 언저리에 터 잡은 월영대(月影臺)를 스쳐 지날 때 마다 으레 떠오르게 마련인 고사이다. 고독한 구름인 고운(孤雲) 최치원(857~?) 선생이 젊은 시절 학문에 정진할 때 현자무가(懸刺無暇)와 인백기천(人百己千)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낼만큼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전언을 말한다. 여기서 현자무가는 공부를 하는데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노끈으로 천장의 시렁이나 대들보에 묶어 매달고(), 졸음이 오면 가차 없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無暇)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로매진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백기천은 남이 백 번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는 뜻으로 선생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부친께서 써 주신 글귀로서 평생의 좌우명(座右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용(中庸)203절에도 이와 유사한 글귀가 보인다. “남이 한 번 해서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하며(人一能之 己百之)”, “남이 열 번해서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 한다(人十能之 己千之)”로써 꾸준한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 6두품 집안에 태어난 선생은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12세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유학의 비조(鼻祖). 선생이 저술한 계원필경(桂苑筆耕)의 서문에 따르면 유학길을 떠나기 위해 배에 승선하려는 순간 그 부친이 십 년 내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리고 당에 가면 오직 학문에 매달려라.”라고 일렀단다. 지엄한 부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학문에 진력하며 주옥같은 고사를 만들어 낼 만큼 정진했다. 결국 열성을 다해 유학 온지 6년째인 17세에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등용되어 강소성 남부의 작은 고을인 율수현에서 현위(縣尉)로 관직생활을 3년간 하다가 21세 되던 해에 사임했다. 그리고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박사굉사과(博士宏詞科) 준비를 위해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으나 전란(戰亂) 때문에 과거시험이 무한정 연기되어 암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기약 없는 은거 중에 문인출신 고변(高騈)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로 부임해 왔다. 그 고변의 휘하에 있었던 과거시험 빈공진사과 동기생이며 친구인 고운(顧雲)의 천거로 절도사 직속으로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이 무렵(879)에 황소(黃巢)의 난이 발발했다. 고변이 이를 토벌하기 위해 나서면서 선생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이 난의 평정과정에서 선생인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크게 공헌한 것으로 인정되어 황제인 희종(僖宗)의 격찬과 함께 정5품 이상에게만 수여한다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고 큰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들이 이방인을 은근히 천하다고 여기며 차별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과 향수병에 시달리던 선생은 16년의 디아스포라(diaspora) 생활을 접고 28세 때 귀국을 결심했다. 이에 황제인 희종이 선생의 공훈에 걸맞게 예우하여 당나라 사신 자격으로 귀국하도록 파격적인 은전을 베풀었다.

 

신라의 헌강왕은 귀국한 선생께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했다. 시독은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이고, 한림학사는 당나라에 올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6두품 출신인 선생이 신라에서 겪는 신분의 벽인 유리천장(glass ceiling)은 너무도 높고 두껍고 단단했다. 주위 귀족들의 혹독한 시기와 질투를 버텨내지 못해 자청하여 지방관직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여러 분야에서 시나브로 누적된 병폐로 명운이 다해가는 나라의 변혁을 위해 38세 때 시무10(時務十條)를 진성여왕께 건의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성골과 진골인 기득권 세력의 끈질긴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야망은 크고 높았지만 기득권 세력과 신분제라는 철옹성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이런 현실의 벽에 꽉 막혀 끝없는 고뇌와 좌절을 절감한 지식인은 신라 중흥이라는 미완의 꿈을 미련 없이 접은 채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리고 나라 안 여기저기를 떠 돌았을 게다. 그러다가 마산 합포에 이르러 별장인 합포별서(合浦別墅)에 기거하며 명경같이 맑고 조용한 바닷물에 영롱한 달빛이 일렁이는 명당에 월영대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고매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찍이 공자가 군자삼락(君子三樂) 중에 최고라고 이르던 인재교육으로도 정신적인 헛헛함을 달랠 길이 없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가야산 해인사로 입산해 세파에 찌들어 병이 깊어진 세상과 결연히 연을 끊고 은거하다가 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불후의 업적을 기리며 후세 문인들은 선생을 한문학의 조종(朝宗) 혹은 동국문종(東國文宗)이라고 추앙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조선문인들은 문천자(文天子)라고 숭상하기도 했다. 별처럼 빛나는 많은 시문 중에서 당나라 유학의 고독한 심정을 담은 추야우중(秋夜雨中)과 말년에 은거하며 속세를 뛰어넘는 경지를 잘 나타낸 가야산독서당(伽倻山讀書堂)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편, 저술로는 계원필경 20, 사륙집(四六集) 1, 문집 30권 등을 비롯해 많은 역작들이 있다.

 

다양한 자료들을 꼼꼼히 살필수록 선생은 천재라기보다는 노력가이고 진솔한 이웃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그려지며 다정하게 다가왔다. 특히 누구도 넘보기 힘든 고사를 만들어낸 신실한 기품과 대쪽 같은 성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발명왕 에디슨의 명언이 언뜻 떠오른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이다. 이는 혹시나 에디슨이 고운 선생이 만들어낸 고사의 참뜻을 슬쩍 차용해서 남긴 게 아닐까? 선생의 흔적인 월영대에서 연유했는지 아니면 달의 이미지가 서정적이고 문학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 길 없다. 어찌되었던 마산에는 월영, 월포, 월남, 두월, 반월, 월성, 신월, 완월 따위의 달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따스하고 안온하게 느껴짐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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