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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12-21 17:53
  • 전전반측
  • 정계순 저 최숙미 엮음
  • 해드림출판사
  • 2021년 12월 15일
  • 신국판
  • 979-11-5634-489-6
  • 13,000원

본문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올 굵은 석새삼베치마 어머니 시름 내 심정 긴 이랑에 뿌려 놓고 종소리 나도록 지붕에 올라 박꽃으로 핍니다.

한밤을 뒤척이다 돌아눕는 베갯머리 손 시린 일생 위에 목 메이던 목숨인데 하얀 등 하나 어스름에 탑니다.

어머니의 두루마리 글 중의 일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못 다니고 외할아버지 사랑채에서 익힌 언문이 다였지만 어머니는 분명 문장가십니다. 세로로 흘려 쓴 단어마다 문학적인 언어들이 수를 놓고 향기를 품어 규방가사로서 손색이 없을 성싶습니다.

 

어머니 소천하시고 내게 주어진 몫이 두루마리를 책으로 엮는 일이었습니다. 한지가 부족해선지 세로로 쓴 글 위로도 여백 없이 촘촘히 써 내려갔습니다. 질 나쁜 한지가 오래되고 낡아 테이프로 붙여가며 겨우 문장을 이었습니다. 붓으로 쓴 글도 있지만, 시중에 파는 사인펜을 사용하여 쓴 글에 물이 묻어 지워진 부분은 비워 두었습니다.

어머니가 상기하여 써 내려간 글이다 보니 참고 자료가 없어 고어에 막히고 소리 나는 대로 쓴 글과 경상도 사투리까지 해석하느라 전전긍긍했습니다. 고어는 사전에서 알아내기도 했지만, 친정 식구들의 식견을 다 동원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어머니 소천 하시고 여러 미련이 남았지만, 두루마리 글을 생전에 옮겨놓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농사일에 지쳐 쓰러질 만도 한데 틈만 나면 머리맡의 한지에 글을 쓰시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글에 무심한 자식들은 좋은 한지 붓 하나 사드릴 생각을 못 했으니 불효막심합니다. 나도 늦깎이 작가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글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았고, 어머니가 문학에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정신이 혼미한 때였으니 꿈에라도 오시면 어머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존경한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설워하는 장녀 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한 어머니

 

어머니의 글에 나오는 전전반측(輾轉反側)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바라만 봐도 흐뭇한 장녀 출가시켜 자식 넷에 어우렁더우렁 잘 살 줄 알았건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설워하는 장녀 생각에 전전반측할 때마다 글을 쓰신 듯합니다. 병환 중에 있는 우리 현서, 고풍참알채*라고 하급관리들도 사오번이나 간다는데 장모가 뭐가 해롭다고. 눈 떠 있을 때 못가 본 게 철천지한이랍니다.

유난히 꽃을 잘 가꾸셨던 어머니는 글 속에도 계절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자주색 노란색 국화는 이미 찾아왔건만 흰 이슬과 단풍은 그늘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동지섣달 동백은 초록 잎 속 홍색 꽃이 곱다고. 어느 글엔 오랜만에 서로 만나 달을 베고 잠이 들었답니다. 외조부님 사랑채에서 읽었을 심청전과 이항복은 대화체를 섞은 감정선이 얼마나 소상한지 단편소설을 읽는 듯합니다. 청이의 효심에 눈물을 섞고 눈치 없는 심봉사 말에 혀를 차며 글을 쓴 듯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 세월을 전전반측했을지. 해방 후엔 몇 가호 되지도 않는 동네에 공산당 바람이 불어 글께나 읽은 젊은 사람들은 죄다 공산당원이 되었답니다. 625가 끝나고 몇 사람들은 이북으로 가고 아버지는 숨어서 지내는 데 가족들이 경찰서로 끌려가 고초당한 일은 차마 글로도 말로도 할 수 없다 하시던 어머니. 에둘러 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수치와 수모마저 입을 닫고 가셨기에 전전반측한 어머니의 인생이 너무도 측은합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자수하여 마산 형무소에서 형을 마치셨습니다. 고문 탓인지 온몸이 진창이 되어 평생 약골로 사시다가 소천 하셨는데 먼저 가신 아버지를 그리는 사부곡이 절절합니다. ‘자기는 글로 쓰고 나는 먹물 갈고 그렇게 살았는데 내가 글을 쓸 때 먹 갈아주지 않고 어찌 후세상을 가버리었냐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소천하신 후 적적할 적마다 글을 쓰는 날이 늘었을 성싶습니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외로우면 외롭다 글을 쓰고 그리우면 그립다 글을 쓰신 듯합니다. 다리 아파 마실도 못 가시니 무릎걸음으로 마루에 나앉아 담장 너머 오가는 이 바라보다가 밤새 쓴 글을 읽으며 무료함과 외로움을 덜지 않았을까요. 85세에 쓴 글은 어느 청상과부의 인생을 음률에 맞춰 그림처럼 그렸습니다. 흐름이 유연하고 문장마다 애조가 진합니다.

 

책을 보고 쓰는 모습을 뵌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기억력과 식견과 문장력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어머니 생전에 국문과에 다니는 사촌 오빠가 가져간 두루마리는 얼마나 돌려봤는지 반년 만에 너덜너덜해져 돌아왔답니다. 이웃 동네 아낙이 두루마리 한 편을 빌려 가서는 갖다 주지 않아 아픈 다리를 절며 찾아왔노라고 당신의 글에 애착을 보이셨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당신들 살아생전에 책으로 나온 어머니 글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재촉이십니다.

더러는 분실되기도 했다는데 남겨진 두루마리가 책 한 권을 엮을 만큼입니다. 골골 팔십이셨지만 어머니의 인생이 묵향처럼 은은합니다. 소천하신 지 몇 년 만에 책을 엮을 준비를 하니 후회와 아쉬움과 죄송함이 앞섭니다. 우리 육남매 모두 어머니의 유전자를 닮아 문학성이 있습니다. 그중에 큰 언니와 제가 문학을 합니다. 이제는 저도 전전반측할 적마다 글을 쓴 어머니의 행복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88세에 운명하셨는데 사라질 듯 기어가는 글씨체로 내게 남긴 쪽지 한 장이 마지막 글이 되었습니다. ‘숙미야 면느리 상구달인대 내가 눈을 감그들날 봉기 오지마라 느으식구 다 오지마라우리 며느리 산고달인데 혹여 부정이라도 탈세라 당신 장례에는 손자도 우리 식구도 오지 말라 하십니다. 펜 잡을 힘도 없는 손으로 이별을 고한 어머니의 글씨는 볼 때마다 목이 멥니다. 두루마리 글 뭉치에 어머니 마지막 쪽지 글도 넣으려 합니다. 전전반측한 인생을 사셨지만, 두루마리 글을 쓰시며 행복해하셨을 어머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육남매가 뜻을 모아 어머니의 두루마리 글을 책으로 엮습니다. 글을 쓰시며 행복해하셨을 어머니만큼 행복해하며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책을 엮으며 4

 

1~5

1. · 15

2. · 24

3. 외조부 지은 글 · 36

4. 김영 김씨 외조부 지은 글 · 45

1) · 45

2) 정월보름밤 송죽 풍을 듣다 · 46

3) · 46

4) · 47

5. · 55

1) 나의 소설이라 · 55

2) 모친이 자식에 대해서 지은 글 · 56

 

6~9

6. · 64

1) · 64

2) · 65

 

7. 사철꽃 지은 글 · 72

1) · 72

2) · 73

3) · 73

 

8. 송정이라 · 78

1) · 78

2) · 78

3) · 79

4) 모친이 자식에 대해서 지은 글 · 79

 

9. 팔십 다섯 (85세에 쓴 글) · 96

1) 신혼시절의 생이별 · 96

2) · 98

3) · 99

4) · 101

 

10~14

10. 소설가 · 123

11. 한평생 소설가 · 129

12. 유충렬전 · 140

13. 서울 필운동 사는 이항복 이덕형전 · 156

14. 칠십 둘에 쓴 글 심청전 · 175

15. 멀리 가신 사돈 말로서는 전송 못하고 전으로서 두어 자 기리리다. · 188

16. 최병수 아버지께서 쓰신 사성 (막내 재신 혼사) · 193

17. 한평생 산 소설가 2. · 201

 

경남 고성 행정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부친 사랑채에서 언문을 익혔다. 남편 최병수 씨와 혼인하여 24녀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의 일제 강제징용과 공산주의에 휘말린 일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두 분은 성정이 유하시어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농사일 틈틈이 한지에 글을 쓰셨는데 남기신 두루마리 글을 작가인 셋째딸 최숙미가 책으로 엮었다.

흐린 여러 날 동안 당신을 못 뵈올 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온몸이 젖었는데도 마음은 떠돌이 구름 돌아올 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잊어도 당신께선 나를 못 잊어 하늘 밖 땅 끝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면서 언젠간 돌아올 날의 그 기약에 목맵니다.

천둥치고 벼락 때려도 놀랄 줄 모르던 내가 문득 어느 날 밤 밝혀 듣는 말씀으로 오늘은 당신을 따라 지친 발길 옮깁니다.

바람 따라 구름 보내고 새 하늘 맑힌 후에 당신은 그 옛날처럼 미소 지어 반기오니 한낮 꽃으로 해를 쫓아 돌렵니다.

 

참숯처럼 달아오른 비탈진 밭 잔돌 골라 한 뼘 땅 고추밭을 가꾸시던 어머니 그 정성 곱게 일어 서산 낙도도 탑니다.

바람이 밀어올린 청 하늘, 별빛에서 쏟아져 내린 햇살 열매마다 단물 넣고 잠자리 나래 끝에서 낙엽 한 잎 떨어진다.

자주색 노란색 국화는 이미 왔건만 흰 이슬과 단풍은 그늘을 바꾸지 않았네. 그늘져 있다.

기러기들 강물에 그림자 지나는 손님 바라보고 잉어가 바람에 뛰어오르니 바다 가을이 깊었네.

냄새가 나서 보물이 아니나 빛을 발해서 보물인데 불의 정신이 물을 능히 이기구나.

이슬 같은 모양새를 내고 때때로 번갯불처럼 번쩍이며 불타 불빛이 달과 함께 머물러 밤새 새벽까지 비치네.

온 세상에 널리 퍼져 파는 장사가 떠들고 옛날에는 어느 곳에도 손님이 만날 수 없었는데 머리 꼴은 둥글고 기름등잔 모 옷 심지는 타고 심지의 실은 잘라져도 불빛은 더욱 오래 새롭네.

 

산은 점점 붉게 물들고 들판은 푸르고자 하며 지난해 화초는 다시 나서 푸릇한데 고금의 사람들 발자취는 모두 다하고 없는데 봄을 알아 쓸데없이 세상사정을 느끼네. 한탄하네.

바닷가 산에서 잔 들고 깊이 시름하니 하늘은 멀리 푸르고 찬데 사람들은 새 무덤에 곡하고 손은 난간위에 있구나.

해질 때까지 불을 금하여 아침에 불씨를 내던졌고 어젯밤 지은 밥이 오늘 낮에 상에 올라 실 같은 국수를 드리니 정기가 무덤에서 소생하고 꽃향기를 투기하고 즐길 여지가 있어 아름다운 난초에 싹이 돋네.

막걸리초 주석잔 계자후추를 불려 일천 봄날 명절 지금에서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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