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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7-27 09:49
  •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 백종근
  • 해드림출판사
  • 2023년 07월 31일
  • 신국
  • 979-11-5634-547-3
  • 15,000원

본문

언젠가 우리나라 지역별 복음화율의 통계를 훑어보다가 놀란 적이 있다.

왜냐하면, 군산, 익산, 김제를 포함한 이 일대가 여타 지역에 비해 유난히 높은 복음화율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30%를 웃도는 이 지역의 높은 복음화율은 필자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특별히 이 지역의 복음화율이 그렇게 높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서 펼쳤던 선교사들의 선교전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초기선교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역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으로 분열된 미국은 심지어 교단까지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 있었지만 내한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일치를 표방하며 장로교 공의회를 결성하고 협력했으나 문화적 토양에 대응하는 방식과 그들이 펼쳤던 선교전략만큼은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지역 선교를 맡았던 남장로교만의 특징적인 배경과 대응 방식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호남 땅에서 활약한 선교사들은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남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지나고 있었지만 아물지 않은 상흔으로 얼룩진 남부의 선교사들이 호남 땅에 들어온 것 역시 절묘한 조우였다. 열강의 다툼 속에 국권을 상실해가는 조선을 바라보며 동학으로 피폐해진 호남 땅의 백성들이 겪는 좌절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준비된 정서가 있었을뿐더러 자신들이 위로를 찾았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위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둘째, 복음에 대한 집단의 반응 정도를 수용성이라 정의한다면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의 아픈 역사가 사뭇 깊게 드리워져 있고 일제의 수탈에 저항의 몸부림을 쳤던 이 지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고조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팀 사역(복음, 의료, 교육)으로 대처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구역에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거점을 중심으로한 선교를 펼쳤다. 그 거점 중심 선교가 더 성공적인 선교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스테이션 운용에 익숙한 그들만의 독특한 지역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척 시대부터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던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아시엔다2)와 유사한 스테이션 운용 자체가 이미 그들이 오랫동안 공유해 왔던 일상의 문화였다. 이런 이유에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스테이션 시스템을 그들은 손쉽게 적용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남장로교만의 독특한 배경과 대응 방식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 부임한 선교사들은 호남선교에 효율적인 거점으로 일단 전주와 군산을 물망에 올렸다. 전주는 전라도의 수부首府였기 때문에 지부 설치를 당연히 여겼고 군산은 선교 물자를 공급하는 물류의 통로라는 이유에서였다. 수로水路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군산은 배를 이용해 접근이 쉽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육상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물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놀랍게도 이미 선교사들은 개항 이전부터 수탈로 얼룩진 탁류濁流의 금강이 아니라 전도선에 복음을 태우고 너른 호남평야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실어 나를 수 있는 희망의 물줄기로 보고 있었다.

이렇듯 그들만의 배경과 방식으로 대응한 선교전략이 맞아떨어지며 이 지역 선교는 빠르게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하위렴 선교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그의 역할과 비중에 주목하고 그가 가시화했던 남장로교 선교전략이 이 지역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의료, 교육, 복음 사역 등의 분야에서 전천후 사역을 할 만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선교사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사역했던 3개 선교지부 어디서도 스테이션 조성이라는 마뜩잖은 일이 맡겨지고 있었다. 전문적 지식이나 안목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병원과 학교건축 그리고 교회 설립 등을 포함한 유형의 선교기지 조성은 물론 나아가 공의회와 노회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해 교회 조직과 제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도 그의 수완手腕은 빛을 발했다. 이처럼 그가 구축한 유무형의 인프라를 통해 그 이후의 호남선교는 발길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남장로교의 선교 기반을 다듬어 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기치 않은 시련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7인의 개척선교사였던 아내 데이비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선교 초기부터 그의 사역에 위기를 맞아 군산지부의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하기도 하고, 얼마 후 에드먼즈와 재혼하면서 그의 선교 여정에 재시동을 걸었으나 무리한 사역은 그의 섬약한 체질을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부진했던 목포지부가 맡겨지고 있을 때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 학교, 병원 등 어는 것 하나도 빠짐이 없이 정상화시키는 동안 자신은 물론 아내 에드먼즈마저 다시 병고에 시달리면서 또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12년 미국에 돌아가 3년 가까운 치료와 요양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이때가 선교사로서 그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복귀해 몇 해 만에 군산 선교를 정점에 올려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1922년 군산지부를 방문했던 해리 로디스Harry A. Rhodes 목사3)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산에서 거둔 놀라운 결실은 씨 뿌리고, 가꾸고, 돋우며 수고한 모든 사역자의 결과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관할 지역의 크기나 스테이션의 위치 등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75개의 교회에 5,000여 명의 교세를 일구고, 성인 세례교인만 1,500명에 이르는 부흥에 크게 놀라워하면서 손배돈과 동역하며 전국 남장로교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뤄낸 야소병원에 와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복음을 들고 외길을 줄달음쳐 사명을 완수한다고 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사역은 바로 그분의 임재와 함께 부어지는 능력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위렴 선교사가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조선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 그 자체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쏟아부은 고귀한 헌신의 자취를 추적하며 그의 선교 여정을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은 전체적인 한국 선교사宣敎史를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키워낸 맹아萌芽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송구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저자 서문 | 4

들어가며 | 7

나가며  | 296

 

 

1부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9:9)

 

1장 하위렴의 고향 켄터키

서부로 가는 관문 22

남북전쟁과 켄터키 23

출생과 성장 26

모교회 레바논장로교회 29

 

2장 선교사가 되기까지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다 32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생자원운동(SVM) 33

의과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로 34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35

개척선교사들의 내한 여정 37

조선 선교의 교두보 딕시(Dixie)’ 40

3장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1896)

하위렴 선교사 조선에 오다 44

북장로교 선교부와 의료사역 협력 50

호남선교를 시작하다 51

선교지를 전남 지역까지 확대하다 52

 

 

2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28:19)

 

4장 풍남문(豊南門)의 성곽길을 따라(1896~1904)

농민항쟁에 스러진 함성을 껴안고 56

전주지부에 합류하다 60

데이비스와 결혼(1898) 62

1차 안식년(1899~1900) 69

데이비스와 함께 복음사역에 전념하다 70

신흥학교의 설립 74

스테이션 조성사역 80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82

 

5장 탁류의 선창(船倉)에 복음의 닻을(1904~1908)

상처(喪妻)의 아픔을 딛고 군산으로 85

부임 당시 선교부의 상황 86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마무리하다 90

팀 사역을 이끌다 91

구암(궁말)교회 당회장으로 94

순회전도 사역 95

개복교회/동련교회/고현교회/대붕암교회(제석교회)/

웅포교회/선리교회/황산교회/만자산교회

사경회와 지도자 수련 107

영명학교 사역 116

 

6장 에드먼즈와의 운명적인 만남

북감리교 내한선교사 에드먼즈 119

도티(Susan A. Doty) 양의 소개로 만난 에드먼즈 125

2차 안식년(1908~1909)과 에드먼즈와의 재혼 127

 

 

3부 땅끝까지 이르러(1:8)

 

7장 남도에서 부르는 전도자의 송가(頌歌)(1909~1912)

유진 벨과 목포 선교지부 132

유진 벨의 후임으로 목포에 오다 136

양동교회에서의 협력 목회 136

백만인 구령 운동의 열풍 속으로 137

양동교회 재건축과 리더십 이양 140

스테이션 조성공사 144

순회사역 145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 154

전라노회 창립에 참여하다(1911) 158

사경회 강사로 참여하다 160

순천 선교지부 개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 161

 

8장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출산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163

혼신을 다한 목포에서의 사역 165

아내의 신병 치료을 위해 귀국하다(1912) 173

몬트리트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다(1913/1914) 176

고비를 딛고 다시 한국으로(1915) 178

 

 

4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16:18)

 

9장 다시 금강을 따라 궁말 언덕에(1915~1918)

3차 안식년을 마치고 182

다시 군산으로(1915) 186

사역분담과 전문화 188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하다(1916) 197

전북노회 창립과 활약(1917. 10.) 201

전북지방 선교 25주년 기념행사(1917. 11.) 204

군산지역 선교 초기 역사를 갈무리하다 206

 

103·1 운동과 군산 선교지부(1919~1921)

군산 3·5 만세운동과 영명학교 223

영명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1919~1921) 224

일제의 간섭과 조선인 탄압에 대해 교단의 관심을 촉구하다 226

조선의 상황에 대한 교단의 반응 228

콜레라가 창궐하다 230

 

 

5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4:36)

 

11장 황토의 들녘에서 추수꾼으로

순회사역에 매진하다 234

동련교회/송산리교회/옥곡교회/제석교회

왕골교회(초왕리교회)/고현교회/함열교회/두동교회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를 추모하다(1920. 6.) 260

하위렴 선교사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행사(1921. 2. 18.) 263

교사 연수회 개최(1921. 3.) 266

12장 만종(晩鐘)이 울리는 석양에 서서

세대교체가 일어나다 270

인돈 부부의 귀환 272

4차 안식년(1922. 7.~1924. 8.) 274

리더십의 이양을 촉구하다 275

해리 로디스의 군산 방문(1924) 277

안식년을 마치고(1924. 8.) 280

유진 벨의 사망 소식을 듣다(1925) 280

 

 

6부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 4:7)

 

13장 하위렴을 추모(追慕)하며

32년 조선 선교사역을 마치다 285

세계주일학교연맹에 김중수를 추천하다 287

소천(1928. 7. 3.) 288

 

14장 자녀들의 이야기

, 셀리나 해리슨(Margaret S. Harrison) 292

아들, 찰스 해리슨(Charles W. Harrison) 293

 

부록

연보(年譜) 301

 

 

 

 

저서: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조선 선교사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의 선교행전

 -예수가 울다설교집 近刊

 

3차 안식년(1912~1915)을 마치고

 

1912년에 신병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던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이태를 훌쩍 보내고 1915년에 접어들고 나서야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에드먼즈의 회복이 늦어진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에드먼즈의 친정아버지 노아Noah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그해 겨울을 캐나다에서 체류했던 원인도 있었다. 그는 78세의 나이로 1914년 성탄을 2주 앞둔 1211일 세상을 떴다.

 

그들이 캐나다에 머무는 수 주간동안 몰아친 한파와 눈 폭풍으로 에드먼즈의 친정이 있던 온타리오의 시골 마을은 수 피트나 쌓인 눈으로 통행이 어려웠다. 하위렴은 장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도 한 동안을 캐나다에서 머무르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미국으로 내려와 내한 준비를 서둘렀다.

 

1915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로 향하는 우편 증기선 시베리아(Siberia)호에 몸을 실었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벌써 셀리나가 6, 찰스가 4살이 되고 있었다. 해외 선교부에서도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건강을 회복해 조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내한 선교부에 단신으로 전하며 함께 축하해 주었다.

 

그 배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으로 파송되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하위렴 선교사 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해 처음으로 임지에 나가는 남장로교 초임선교사들로 하위렴 선교사의 어린 두 자녀를 포함해 일행은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2주간의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고베에 당도했고, 다시 하위렴 선교사의 일가족이 제물포를 거쳐 군산에 도착한 날은 그해 227일이었다.

 

이때 시베리아 호에 함께 승선했던 일행 가운데 토마스 윌슨(Thomas E.Wilson(1886~1917))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아칸사스주 컬럼버스(Columbus), AR가 고향인 그는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한 하위렴의 후배로 건장하고 열정이 남다른 젊은 목사였다. 그는 조선 선교상황을 보고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그곳에서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조선 선교를 지원한 초임선교사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파송이 되면서 곧바로 광주지부에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먼저 내한한 여선교사 조지아(Georgia C. Willson) 양을 만났다. 2년여 교제 끝에 동료선교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19175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선교사 숙소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혼의 단꿈도 채 가시지 않은 그해 가을, 윌슨(T. E. Wilson) 선교사는 아내의 태중에 유복자를 남긴 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지부는 물론 남장로교 동료선교사들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다. 그해 아내 조지아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하위렴은 자신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를 자원했던 후배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어 사역다운 사역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는 것에 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선에 파송되어 죽음을 맞았던 동료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전킨과 그 세 자녀의 죽음, 유진 벨의 두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오웬 선교사의 죽음과 그리고 이번엔 후배의 죽음까지, 계속해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깨달았다. 그리고 조선 선교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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