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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첫사랑,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우미영 > 수상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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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공모전 [은상] 첫사랑,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우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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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0건 조회 755회 작성일 19-11-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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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고를 때 제목의 끌림에 먼저 다가선다. 작가도 내용도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을 오로지 내 감(感)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을 보았다. 빨강으로 채운 '첫'이란 글자의 강렬함에 반해 표지에 장식된 여자의 뒷모습은 투명한 바람이었다. 순간을 머무르다 멀어지는 바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하고 싶다. 언젠가는 살포시 불어와 잔잔하게 일렁이는가 하면 한순간 폭풍 같은 휘몰아침에 모든 것을 할퀴고 돌아서기도 하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솜털하나 흔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 그 바람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허공을 날린다. 그리고 나는 그 여운을 따라 책을 열었다.
아 이와 아이가 만나고 소년과 소녀가 만나고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열아홉 편의 수필에는 파란 하늘처럼 맑게 갠 발그레함으로 추억을 깔고, 뜨겁게 데워지기도 하고 따갑게 베이기도 하는 빛으로 채색되어 간다. 수줍게 두근대는 심장이 분홍으로 달달하게 마음을 간질이는 영상 속에는, 불투명한 습기로 혼탁한 세계를 방황했던 시간들이 필름이 되어 잔해처럼 남아 딱딱하게 응고되기도 하고 말랑하게 흐르기도 한다. 그 중 나에게로 닿은 세 편의 글이 있다.
「가을을 앓다」에서 여자는 문상 가서 나온 팥죽에서 깊은 사연에 잠긴다. 어린 날, 밤길에서 홀로 집으로 가는 길 마주쳤던 반가움. 차가운 빗속에서 따뜻하게 안아주던 온기와 그만큼이나 따끈한 팥죽을 사주던 아이를.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팥죽을 좋아한다는 여자를 보니 바스락 거리는 낙엽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팥죽 한 그릇에 누군가를 더듬을 수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이는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형체가 드러나지 않을 뿐, 가끔 나는 내게 보이는 것만, 인식되어지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라고 말하는, 그래서 첫사랑의 기억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산다는 여자의 진심은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풍성한 색의 향연을 펼치고 떨어지는 낙엽도 바닥에 닿으면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쩌면 그 소리는 고운 빛을 바래고 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보고 싶다는 그리움 때문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내려가는 남자가 있다.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여학생 전용 독서실은 면회금지였던 보수적인 시대였지만, 무작정 내달렸던 건 잔인하리만치 깊어진 열망 때문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찹쌀 도넛을 사들고 버스에 몸을 싣고서도, 발이 시린 것도 모를 만큼 가슴 졸였던 건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란 생각과 만날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이 동시에 덮쳐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캄캄한 까닭 끝에 그녀를 본 남자는 하얀 빛으로 충만 되어 절뚝거리며 다가선다. 절름발이가 되어 그녀의 손을 꼭 잡던 남자는 그 순간을 영원으로 약속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벚꽃이 하얗게 쌓이던 날 그녀와 처음 하는 이별은 비극으로 가라앉고 두 번째는 슬프지 않은 것으로 퇴색해 버린다. 남자는 말한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련한 추억과 젊은 날의 아쉬움으로 곱게 남았을 기억들이다.' 라고. 첫 번째 이별을 기억 속에 비극으로 새겨 넣은 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벚꽃으로 하얗던 마지막까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 끼어있는 그리움마저. 문득 생각해본다. 옛날 절름발이가 되어 그녀의 손을 꼭 잡던 남자의 손이 어땠을지. 아마 축축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차갑게 얼어버린 불안 속에서 열렬한 그리움이 녹아가는 갈망의 온도가 아닐 런지.「복도와 절름발이」에서 나는 시릴 만큼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그에 대한 감정은 이제 지나간 그 순간, 추억 속에 고여 있을 뿐이다. 그는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다. 20세기에 남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라고 여자의 생각을 읽는 순간 가슴속에서 두서없이 허공을 맴돌던 한숨이 탄성으로 터졌다.「20세기에 남은 사람」에서 여자는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남자를 실제로 마주한 순간 어색해 한다. 대상 없는 사랑을 막연하게 꿈꾸던 시절 남자를 만났다. 정서가 맞는 남자. 좋아하는 탤런트를 닮았고, 노래를 부탁해 듣기도 했던, 여자를 위해 빗속을 되돌아 가 우산을 가져다주던 남자는 그 뿐이었다. 여자에게 남자는 지금 말린 꽃잎처럼 꽂혀 있다. 하지만 사라졌다 생각했던 향기는 남자가 머물러있는 곳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말린 꽃잎의 빛깔이 고운 것만큼이나 화사하게 펼친 향기는 여자가 지나오고 남자는 머물러 있는 20세기 그 자리에 둥실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멈췄던 시계가 ing하는 만큼 그렇게 가을을 앓게 될 여자. 반짝반짝 빛나던 순애보가 점으로 번진 남자. 말린 꽃잎, 그 너머를 퍼레이드처럼 장식할 것 같은 여자. 차오르는 따듯함에 가슴을 온전히 내줬던 그들의 사랑은 마치 흑백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사 계절을 통과하는 바람의 공기가 다른 것처럼 사랑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 중에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첫사랑. 새벽의 여명처럼 다가와 시간의 끝에선 선명해질 수도 있는 그 이름. 그리고 언젠가 돌이켜 보면 기억을 흐르는 시간 속에 풍경으로 녹아들어 멋진 자화상으로 완성되지 않을까.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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