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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동짓달에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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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24-01-0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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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에 첫눈


간밤 이른 새벽에 첫눈 즉 서설(瑞雪)*이 내렸다. 기왕 베푸는 축복이라면 푸짐하게 내렸으면 좋으련만 자린고비 선심 쓰듯 찔끔하고 끝나 아쉽기 이를 데 없이 미미한 적설량(3mm)이라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동짓달에 첫눈은 마산에 뿌리 내린지 44년 만에 처음으로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 원래 마산은 기후가 온화해 겨울에 눈 구경 못하고 꽃피고 새 지저귀는 약동의 봄을 맞는 경우가 허다해 눈에 대한 각별한 감정은 유별 날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첫’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고 싶었던 연유인지 ‘첫눈’에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먼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있다가 첫눈 내리는 날까지 그 색깔이 변치 않는다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구전(口傳)이 떠오른다. 한편 조선시대에서는 ‘첫눈 내리는 날’을 지금의 만우절 비슷한 풍습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문학 작품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에서는 첫사랑의 인연이 시작되는 날로 흔히 그려지고 있다.


‘첫눈 내리는 날’에는 어떤 거짓말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 풍습이었다. 지엄한 임금님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용서했다. 한편 첫눈이 오는 날 눈을 곱게 포장해 누군가에게 선물로 보냈을 때, 그 선물 꾸러미의 내용물이 눈(雪)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풀어보면 내기 게임에서 지는 것으로 판정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 게임에서 지면 선물을 보낸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게 불문율이었던가 보다. 이 선물을 보내는 낌새를 미리 알아채면 전달하려는 쪽과 받지 않으려는 쪽이 서로 쫓고 쫓는 숨바꼭질 같은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한편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상왕(上王)이었던 동생 태종이 첫눈 내리던 날  친형인 노상왕(老上王)인 정종에게 눈을 포장한 선물 꾸러미를 보냈는데, 정종도 그 선물 꾸러미를 보낸 것을 눈치 채고 막으려다가 실패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단다. 결국 이 풍습이 지엄했던 임금님들 사이에도 성행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때 조선사회에서 보편화된 관습으로 통용되었지 싶다.


일찍 첫눈이 내렸으니 올 겨울엔 강설량(降雪量)이 많아 내년엔 풍년이 들려나? 자고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겨울을 상징하는 차가운 눈이 풍년을 가져온다’는 아이러니(irony)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며 가을에 파종한 밀과 보리 같은 어린 싹을 겨우내 솜이불처럼 덮고 있기 때문에 매서운 설한풍을 막아줘 결국 얼어 죽는 동사(凍死)의 피해를 줄여준다고 한다. 게다가 봄 가뭄을 덜어줘 풍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아울러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습도가 높아져 황사나 미세먼지가 줄어들고 가축 질병의 확산을 막아준다는 보고이다.


먼동이 트면서 잠자리를 벗어나 거실로 나왔다.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거실의 커텐(curtain)과 블라인드(blind)를 열어 제쳤다. 창밖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훤하고 밝았다. 뭔가 낌새가 달라 자세히 살폈더니 눈이 내린 게 분명했다. 손주 유진이가 자는 방에 들어가 첫눈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시큰둥한 반응에 심드렁해졌다. 손주와 함께 눈 구경을 포기하고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고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으슬으슬 추위가 엄습했다. 그러다가 텅 빈 거실 한쪽의 식탁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고, 지인이 보내준 책을 보다가 싫증이 났다. 이번에는 어제 써둔 글의 퇴고를 하다가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나니 9시가 되었다. 다시 손주를 깨워 학원에 갈 준비를 하라 이르고 곧바로 등산길에 나섰다.


아파트 경내의 도로엔 내린 눈이 그대로였으나 큰길로 나서니 길바닥 눈은 녹아 평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웃 아파트 주변 그늘진 도로변에 주차해 둔 모든 승용차의 보닛(bonnet)과 앞뒤 창문 및 지붕은 하얀 눈을 옴팡 뒤집어쓰고 있었다. 등산로 바닥은 앞 선 이들이 밟고 지났기 때문인지 반쯤 눈이 녹았지만 길옆엔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아침햇살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인지 정상 쪽을 향해 올라갈수록 양지의 눈은 더 많이 녹았고 그늘진 응달엔 새벽에 내린 모양 그대로이었다.


마산 기온이 따뜻한 때문일까. 첫눈이 내린 오늘 새삼스럽게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분명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가로수인 메타세쿼이어(metasequoia)와 은행나무를 비롯해 야산의 무수한 활엽수가 아직도 낙엽이 되어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무척 낯설었다. 앞으로 된 서리가 더 많이 내리고 수은주가 빙점(氷點) 아래로 곤두박질해 설한풍이 윙윙대야 낙엽으로 떨어질 모양이다.


아내는 고등학교 동창 둘과 어울려 부산 여행 중으로 오늘이 사흘째이다. 등산 중에 산꼭대기 한전 송전탑 아래 벤치에 앉아 “지난 새벽에 첫눈이 내렸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답신(答信)이 왔다. “여기도 눈이 오고 바람이 많이 불며 추워! 오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위시해서 용두산 공원 둘러 본 뒤에 친구들 상경시키고 저녁 7시쯤의 버스로 집에 갈게”라고. 이곳 마산에만 첫눈이 내렸다는 생각에서 자랑하려고 메시지 보냈는데 부산에도 마찬가지랬다.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한 셈이라서 조금은 겸연쩍고 뻘쭘했다.


같은 첫눈이라도 젊은 날에 대했던 기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왠지 누군가가 그립고 설레었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련하고 흐릿해 뚜렷한 게 하나도 없다. 이런 현실임에도 첫눈 내린 날 이른 새벽에 창문을 열고 환호할 열정이 남아 있고, 집 떠나 여행 중인 아내에게 첫눈 소식을 전하고픈 마음이 있으며, 동네 뒷산일지라도 등산을 하면서 첫눈을 즐길 열정이 살아 있음은 살아있음의 증좌이기에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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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瑞雪) : 상서로운 눈, 풍년의 징조가 되는 눈.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10월 27일 계묘(癸卯) 10번째 기사’에 적바림되었다는 전언이다.


한맥문학, 2024년 1월호(통권 400호), 2023년 12월 25일

(2023년 11월 1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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