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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해가 될 때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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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87회 작성일 24-01-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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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될 때는 이미

윤복순

 

49재를 산사에 모셨다. 초재 날 ㅇㅇ스님 추모관 앞을 지났다. 최근 만들어진 것 같다. “우리 시어머니 만나 보셨나요?” 왠지 시모가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시어머니는 치매가 오기 전까지 수 십 년을 이 절에 다녔고 그때 스님이 주지였고 그 뒤엔 총무원장이 되었다.

요양병원에서 호출이 잦아졌다. 10년 넘게 계셨는데 2개월 전 혈관이 수액을 거부한다고 해 수술을 받았고 알부민 주사로 조금 회복이 되었다. 부종도 내리고 눈도 뜨셨다. 95세로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수액도 못 맞으면 굶어죽는 꼴이라는데 어느 자식이 수술을 하지 않겠는가.

시모는 15년 전 생활비가 없어졌다고 전화를 하셨다. 그 돈이 없어질 일은 지구가 멸망하는 것만큼 확률이 낮았다. 며칠 후 돈 쓴 곳을 기억해 냈다. 반지가 없어졌다, 통장을 못 찾는다, 이런 일이 빈번해 졌다. 해가 바뀌면서 나가시면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모는 욕을 하고 집을 나가고 경찰서와 지구대에 상습 가출자로 명단을 올렸다. 온 가족이 가실만한 곳을 찾아 밤을 보냈다. 하절기에는 해가 길고 춥지도 않으니 그나마 낫지만 겨울에는 동사라도 하실까 걱정이 많았다.

남편은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을 반대했다. 치매도 요양병원도 부끄러운 단어였던 것 같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어려워져 내가 총대를 멨다. 가출 빈도가 잦아지는데 객사라도 하면 시체도 못 찾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고 싶으냐고 협박을 했다.

시모는 얌전하고 빈틈이 없었다. 신발이든 젓가락이든 말 하는 거든 반듯하지 않으면 용납이 되지 않았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하루에 4000만 번씩 했다. 천 알의 염주를 한 알씩 돌리며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전 한 번 시작하면 1000만 번씩 하신 것이다.

벽장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새벽에 일어나면 청수부터 올리고 밥을 지어 새 진지로 바꿔 올렸다. 과일이든 빵이든 생활비든 부처님께 먼저 올리고 향을 피워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식사도 완전 채식으로 미역국도 잡채도 김치찌개도 고기 넣은 것과 넣지 않은 것 두 종류로 준비해야 했다. 멸치까지도.

이런 성격으로 요양병원 3주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사이 병세는 더 심해졌고 식구들도 많이 예민해졌다. 삶의 질이 최하로 가족 모두가 철 지난 배추밭의 배추처럼 시래기가 되어 갈 때쯤 집 가까이 있는 요양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시모가 악을 쓰지도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입원을 하셨다.

가까워 매주 가 뵐 수 있었다. 면회 끝나고 나올 때면 당신도 따라 나섰고 손을 잡고 못 가게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가 가면 밥 해준다고 화장실로 들어가시곤 했다. 당신 뇌세포가 죽어가는 중에도 자식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본능이다.

당신이 우리 애들을 키워주셨는데 그 애들이 시집 장가 가 아들딸을 낳았다. 손자손녀 사진을 보여주며 딸네 아들네 애들이라고 하면 당신이 키운 우리 애들로 착각을 하셨다. 시모의 시계는 그 시절에 멈춰있었다. “애들 잘 크지?” 그 말만 하셨다. 그 시절이 당신 인생에서 제일 좋았을까.

차츰 적응도 하시고 오락가락 하시지만 그래도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이야기는 나눌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 모셨다는 죄의식이 무디어갈 때 코로나가 터졌다. 면회는 중단되고 되는 얘기든 안 되는 얘기든 당신은 말을 할 수 없고 우리는 손도 잡아드리지 못하니 치매의 속도가 빨라졌을 것이다.

ㅇㅇ스님이 열반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시모가 제일 좋아했던 분이다. 젊은 시절 돈이 없어 한 달에 한 번 절에 갈 때 양초만 사 갈 수 있어도 좋겠다는 서원을 가졌다고 했다. 초는 불을 밝혀 자식들의 머리를 지혜롭게 해준다고 믿고 계셨다.

25~6년 전 시모가 그 스님에게 1000만원을 시주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난 불자가 아니니 내용은 잘 모르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당신 독단으로 결정을 해 야속했다. 돈 챙길 때마다 스트레스 받는 게 싫어 여기저기 융통해 한 달 만에 마련해 드렸다. 스님이 큰 아들 큰 며느리 보고 싶다고 꼭 같이 오라고 했단다.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했는데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돈이 없는데 더 많이 요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던 것 같다.

코로나시절만 아니면 시모의 외출을 허락받아 남편이 천천히 운전하고 내가 옆에서 잘 보듬고 스님 장례에 다녀오고 싶었다. 왜 사람은 할 수 있을 땐 안하고 못 하게 됐을 때 진심이 우러나고 후회를 할까. 남편과 둘이서 문상을 하고 시모는 아프시다고, 그때 못 뵈어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시모는 그 사이 침대에서 떨어져 엉덩뼈를 다쳐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나는 우리 약국에서 코로나 환자가 나오면 안 돼 일절 면회 한번 하지 않았다. 수술 후 기저귀를 차야 했고 걸을 수도 없었다. 노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음식도 떠 드려야 했고 밥에서 죽으로 변했다. 코로나도 버텨낸 당신은 기진맥진이었고 눈도 뜨지 못했다. 그렇게 알부민으로 2개월여를 버티셨는데 가실 때는 순간이어서 아무도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손도 잡아드리지 못해 아쉽고 미안하다.

시모는 절에 가시는 걸 좋아하셨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염불도 맘껏 하시고 매일 그 스님을 만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초재를 마치고 나와 추모관 앞에 섰다. “내가 송 보살 큰 아들 큰 며느리를 보자고 한 것은 어머니를 위해 큰돈을 마련해 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려 했다.” 환청처럼 들렸다. 스님이 만나자고 했을 때 모시고 가 기분 좀 살려주었으면 시모가 많이 좋아하셨을 텐데. 이해가 될 때는 이미...

 

2024.1.15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