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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학 가로되 "70부터 뭔가 보여.”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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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백운학 가로되 "70부터 뭔가 보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103회 작성일 24-02-23 11:02

본문

https://youtu.be/LU0OMrR0WNg?si=uk5HFkT93wO_nR1V

일간지 중앙일보가 2015113회에 걸쳐 연재한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은 그의 육성 증언입니다. 5.16 이후, 18년 동안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뤄냈고, 1987년 민주화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들과 차례로 손을 잡았던 김종필은 20153월부터 12월까지 중앙일보에 마지막 증언을 남기고 3년 뒤 9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16반공 국시의 비밀’, ‘한일 수교 전후의 진실’, 박정희와 3김 시대, 그리고 이회창 · 노무현에 대한 평가 등 현대사 비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관심사는 김종필이 역술인 백운학을 언제 찾아 갔느냐? 알고 싶었습니다.

19614월 말이었다고 하니까 5.16거사 15일 전쯤이고, 병력 투입 부대 선정에 고심하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찾아왔다. 그가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 한 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석정선은 정군운동을 같이 했다. 그 해 2월 나와 함께 군복을 벗었다.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였다. 19609월 영관급 장교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정군 의지를 따져 물은 사건이었다. 예편 뒤, 나는 혁명 작업에 뛰어든 때였다면서 - "백운학은 종로 5가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고,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대기실에 있다가 차례가 돌아와 석정선이 방으로 들어갔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보면서 대뜸 밑도 끝도 없이 "됩니다!"라고 소리쳤고, 나는 백운학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 라고 주의를 주니까 백운학이 껄껄 웃기만 했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 다들 올 것이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낌을 받았다고 김종필이 회고했으며, 5.16군사혁명 이후에도, 김종필과 백운학의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시청 뒤, 다옥동 요릿집에서 백운학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 "각하,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라는 말을 했고, 그 다음엔 어떠하냐고 내가 물었을 때 백운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말한 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집권했다는 이야기도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종로5'백운학 역학연구소'를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김종필이 다녀 간 얼마 후였고, 필자가 갔을 때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과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있었습니다.

김종필은 석정선 권유로 마지못해 백운학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그는 5.16 거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장한 각오와 남다른 느낌을 풍기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고, 백운학이 그것을 꿰뚫어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필자가 백운학을 찾아 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필자는 21세였고, 까닭 없이 아무나 붙들고 울고 싶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세상만사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예비무당은 내림굿하기 직전 앓아 눕는다.”고 했는데 필자의 모습이 그 짝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낯 찌푸리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들은 터라, 백운학이 필자를 보면서 "세상 걱정 근심 혼자 맡은 사람 같구나. 얼굴을 펴라" 했습니다.

첫 인상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였습니다. 조실부모하면서 부모 덕을 받지 못한다. 결혼을 해도 배우자와 불화가 잦을 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박복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비감스런 말에 백운학 생각이 바뀌었는지 필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생년월일을 물었습니다.

태어난 연, , , , 네 간지를 필자가 보는 앞에서 적고, 그것을 보면서 백운학이 말했습니다.

"70이 넘어서부터 뭔가 보여"

"무엇이 보입니까?"

"출판 쪽이야."

필자가 반기면서 - "출판 쪽이라니요? 제가 출판사 사장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면서 관심을 보이니까 "그건 나도 몰라. 그 때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했습니다.

그 후, 필자는 춘천에 살면서, 의암댐 건설 공사장에서 막노동 하다가 경기도 안양읍에 정착한 다음, 서울 청계천 중고서점가를 드나들면서 까닭 없이 아무나 붙들고 울고 싶을 만큼 절박한 심정을 해소하려고 - 이 책, 저 책 사서 읽으면서 진실 규명에 전력투구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도 필자처럼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11세부터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의 신앙은 일반적인 가톨릭 신앙과 달랐다고 합니다.

신학보다는 수학, 자연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학교 밖으로 나갔으며,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32세가 되던 1628년 겨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방법서설을 출판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학을 기본 신념으로, 철학을 포함한 모든 진리를 수학적 원리로 해석하려고 노력한 학자였습니다. 전능한 악마에 의해서 2+36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면, 6에 대한 의심을 기반으로 정답 5를 찾아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록물에 가설적 견해를 덧붙이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가설적 견해는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론체계를 연역할 때 필요합니다. 창의적 가설로부터 이론이 도출되고,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면 진리가 됩니다. 창의적 가설은 지식을 확대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창의적 가설에 몰두한 나머지 "세상 걱정 근심 혼자 맡은 사람 "처럼 오만 상 찌푸린 모습으로 백운학을 찾아 갔던 겁니다.

백운학이 필자의 관상을 본 것처럼 필자 또한 백운학이 길흉화복을 점치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 상황과 시대 추이를 전망하는 능력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정희 주도의 군사 혁명은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던 국민적 염원을 규합,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민적 염원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쪽으로 발전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박정희는 유신 체제로 장기 집권을 생각하다가 집권 18년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백운학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종필이 그 다음에는?” 하고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적 염원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21세였던 필자에게는 ‘70부터 뭔가 보인다."는 말을 했습니다.

필자가 "뭐가 보입니까?" 물었을 때 출판 쪽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따라 잡지 못한 의식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1961년 백운학을 찾아 갔습니다. 백운학이 말한 70은 서기2011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계천 중고서점가를 드나들면서 이 책, 저 책 사서 읽으면서도 의문과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하던 필자에게, 나이 70이 되면 좋은 일이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급변하는 시대 추세를 21세였던 필자의 사주에서 읽어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터넷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판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인터넷 역사는 1950년 경 컴퓨터 개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퍼스널컴퓨터는 서기2011년 경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역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서, 인터넷 검색은 <굽으로 땅을 치며 달리는 말 위에 오른 격>이 되는 것이고, 광명세계가 활짝 열렸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새봄과 함께 더 많은 활동 왕성하게 하시기를 기원 드리겠습니다.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제임스 A. 마차노가 쓴 "아흔이 되어가는 작가에게 들려주는 시"를
암송 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불타는 노래, 당신의 산호초 해변, 당신의 파도치는 바다, 당신의 푸른 초원,
용암이 이글거리는 화산, 마음의 욕망이 성취된 상태, 머리 어둠 속이 환하게 밝아오는 열린 길,
내 젊었을 때 그 길을 여행할 힘이 있었고,
이제 나이 들어 젊음이 사윈 다음에는 반추 할 추억이 있나니.
그리하여 매일 밤 쉼 없이 자갈길을 걸어가노라. … ”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