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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봄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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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5건 조회 1,171회 작성일 20-04-25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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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단상

윤복순

 

꽃샘추위

추워 추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난로를 아직도 들여놓지 못했다. 약국에 오는 사람들도 왜 이렇게 춥데요 하며 진저리를 친다. 어느 해인들 꽃샘추위가 없었을까마는 올해 더 추위를 느끼는 것은 코로나19로 움추러든 마음 때문이 아닐까.

대학 1학년 때다. 모든 것이 서툴고 캠퍼스 위치도 잘 몰랐다. 말이 대학생이지 거의 매일 8교시까지 수업이 있고 실습이 있는 날이면 실험이 종료돼야 끝나 고등학교 연장선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시내버스도 자주 있지 않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스쿨버스를 타고 나와 집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겨우 클래스메이트의 얼굴을 익히고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자는 의견을 모았다. 어느 날 꽃샘추위가 왔다. 찬밥인데다 교실은 급우들이 다 빠져나가 더 썰렁했다. 여고 동창인 KL 셋이서 궁리를 했다. 약대 건물 옆에 온실이 있다. L이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온실 안은 안방 같았다. 따뜻함에 행복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예쁜 꽃과 잎이 넓은 나무는 덤이었다. 옹색하지만 의지가지 쭈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폈다. 반절쯤 먹었을까 담당자가 들어왔다. 온실에서 밥을 먹는 것은 식물에게 독이라고 빨리 나가란다. 어떻게 이곳에서 밥 먹을 생각을 했느냐며 외계인 취급을 했다. 무슨 과냐고 물었는데 약대 망신시킬까봐 미안해요고개를 숙이고 다리야 나 살려라 하고 뛰었다. 지금도 꽃샘추위가 한 겨울 추위 보다 더 춥다.

 

취업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약사면허증은 나오지 않은 예비약사 때다. 동기들은 아름아름 거의 취직을 했고 나만 못했다. 선배가 대전에 관리약사 자리가 있다고 불렀다. 마침 큰언니가 그곳에 살아 주거 걱정은 없었다. 올라가 보니 면허대여약국이다. 급한 마음에 그곳에라도 취직하고 싶었다.

약사회에 들렀다. 그 약국은 이미 면대약국으로 다 알려져 있고, 내가 직접 개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약사회장이 훤히 알고 있었다. 면대는 불법이다. 첫 취업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빈손으로 내려왔다. 부모님께도 동네 사람들 보기도 면이 서지 않았다. 면허증이 나오면 곧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둘러댔다.

면허증이 나오고도 한 동안 집에 머물렀다. 연락이 올까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속절없이 하루해가 저물곤 했다.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햇빛이 너무 좋아 집 앞 논으로 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거니는데 우렁이가 논에 많이 있다. 한 나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다음 날 또 논에 나갔다. 오전이라 물이 차갑고 우렁이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두어 시간 있다 다시 나갔다. 봄 햇빛이 어느새 물의 온도를 덥혀 놓았다. 큰 논의 물 온도를 이만큼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자연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일주일 쯤 지났을까. 서울에 관리약사 자리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관리약사란 말에 미리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여약사가 주인으로 자녀들 때문에 약사가 필요했던 곳이다.

서울엔 있을만한 곳이 없는데 숙식제공을 하겠단다. 동갑내기 여직원과 약국에 딸린 방에서 생활했다. 그녀가 살림과 청소는 다 했다. 생활비가 들지 않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1년 반 만에 100만원을 모았다. 아버지께 고스란히 드렸다. 아버지가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방앗간에 쌀 빚을 졌는데 다 갚았다고 하셨다. 1977100만원은 지금 돈으론 얼마나 될까. 내 등록금이 3~4만원이었다. 그날 아버지 얼굴이 논물 온도를 높이던 봄 햇살보다 더 밝았다.

 

외할머니

결혼하고 3년 동안 남편과 둘이 재미있게 놀다 아기를 갖자고 했는데 2년 밖에 못 놀았다. 임신했을 때 아쉽기 보단 좋았고 신기하고 많이 행복했다. 입덧이 심해서 남편에게 어린양 많이 했다. 그 당시 전 국민 의료보험이 아니었는데 남편이 군인이어서 나는 되었다. 편안하게 산부인과에 다닐 수 있었고 출산 예정일이 잡혔다.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대구에 왔다. 이미 봄이 시작되어 어머니는 농사 일로 바빠 할머니가 내 산후조리를 맡았다. 단칸방에서 셋이 살았다. 할머니가 오시고부터 나는 완전 공주가 되었다. 호강 오래하라고 그랬는지 애기는 예정일보다 20일 이상 늦게 낳았다. 할머니는 매일 나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기도를 했다.

입덧이 심해 아기는 2.7Kg이었다. 눈이 땡그라니 얼굴에 눈 밖에 없는 딸을 낳았다. 할머니는 당신이 애기 여럿 받아봤지만 이렇게 작은 애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석 달 이상 아기를 키워주셨다. 여자는 해산하고 몸조리 잘못하면 평생 골병든다고 손끝 하나 까딱 못하게 했다. 할머니가 덕분에 남편도 금이야 옥이야 나를 챙겼다. 나는 여왕마마가 된 듯 했다.

남편은 외할머니도 끔찍이 위했다. 생선을 구워 할머니 밥 수저에 가시를 바라 놓아 드리고 좋아하시는 빵을 자주 샀다. 할머니는 딸 셋의 사위한테도 못 받아본 사랑을 외손녀사위한테 받는다고 흐뭇해 하셨다.

2년 뒤 봄날에 외할머니는 나의 두 번째 출산을 똑 같이 봐 주셨다. 딸 낳고 아들 낳았다고 더 예뻐해 주셨다. 애들이 자라는 동안 약국에 자주 오셨고 천수를 누리시다 딸아이의 눈만큼이나 투명한 봄날 가셨다.

 

2021.4.22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이야기 하나. 60년애 말 대학에 다닐 때 얘 기입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로 모두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지요. 하지만 이른 봄 개학 꽃샘추위가 몰려오던 무렵 추운 강의실에서 얼음 같은 도시락 먹기가 힘들었지요. 그래서 여유가 있는 날엔 식당에 가서 10원인가 했던 국 한 그릇(말이 국이지 간을 적당히 했던 뜨거운 물)을 사서 말아 먹기도 했지요.

이야기 둘. 배움 때문에 초등학교(국민학교) 졸업 후 부모님 곁을 떠나 타향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계속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매 해 개학을 한 뒤에 찾아오는 꽃샘추위가 지독하게도 추워 무척 곤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 셋. 지난해 4월 23일 손주의 생일 날 너무도 더워 생일에 초대 받았던 손주 친구들이 반팔 옷을 입었었는데......, 올해 그날은 너무도 꽃샘추위가 심해 아침저넉으로 겨울 옷인 패딩을 꺼내 입었었습니다. 아마도 패악질이 심한 괴질(怪疾)인 코로나-19 때문일까요. 어서 물러 갔으면....

김언홍님의 댓글

김언홍 작성일

봄볕처럼 따뜻한 이야기가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네요.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2020년이겠죠?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닐까요 ㅎㅎ
글 말미 연도를 보고 빙그레 웃습니다.
그런데 단상들이 결국 선생님의 삶으로 다 이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행복한 가정이네요.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답답해서 풋풋한 젊은 날을 적어 봤어요.
기분이 많이 전환됐습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여름이 오겠지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