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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또 다시 새벽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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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1,037회 작성일 20-05-0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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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새벽등산

 

이즈음 툭하면 어슴푸레 먼동이 트는 첫새벽 등산길을 나서게 마련이다. 때 이른 기온 상승으로 인한 한낮의 더위를 비껴가려는 불가피한 묘책의 일환이다. 새벽 4시 무렵에 잠자리에서 기상해 간단히 채비를 차리고 나서는 까닭에 얼리 버드(early bird)의 이점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매년 하절기가 되면 의례적으로 등산길을 새벽으로 바꿔왔다. 이 같은 패턴을 오랫동안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레 새벽등산 애호가 여남은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며 억지 춘향 격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그룹의 산행 속도를 따르며 어울리기에는 간극이 뚜렷했을 뿐 아니라 나보다는 한식경(-食頃) 쯤 일찍 집을 나서는 때문에 자의반타의반의 이유에서 외톨이 산행을 꿋꿋하게 밀어붙이며 이어가고 있다.

 

여느 때는 낮 시간 등산을 고집한다. 하지만 하절기에 껄끄럽게 작열하는 햇볕을 비껴가기 위한 차선책으로 새벽등산 길을 택한 지 꽤 오래 되었다. 나름대로 최대한 빠른 시각에 기상해 집을 나서는 까닭에 때로는 헤드랜턴이나 손전등에 의지하여 등산을 했음에도 단 한 번도 제일 먼저 정상을 밟고 우뚝 섰던 적이 없다. 대체적으로 빠르면 여섯 번째 정도이고 자칫하다 한 발 늦으면 열 번째쯤이었다. 이번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며 다시 조우한 그들 그룹 중에 칠십 중반을 넘긴 셋이 눈에 띄지 않아 무척 궁금했다.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즉석에서 안부를 여쭸다. 건강 문제로 정상을 겨냥하는 등산길 대신에 산림을 관리하려고 산비탈을 따라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하게 뚫은 임도(林道)를 걷고 있다는 귀띔이었다. 이 같은 변화에 적응은 무심한 세월에 인생무상의 진솔한 단면을 드러낸 움직일 수 없는 증좌가 아닐까.

 

내 등산 얘기이다. 늘 같은 길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만큼의 세월에 걸쳐 걷고 또 걷고 있다. 그런데 한 해 한 해를 넘기면서 쌓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영향이 미친다는 생각이 무겁게 짓누른다. 해를 거듭할수록 산행 속도가 느려지고, 된비알이나 가파른 깔딱 고개를 오르다보면 다리에 힘이 빠져 허둥댄다거나, 걷다가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불거지면 한사코 쉴 명분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등산 중에 맞닥뜨리게 마련인 깔딱 고개를 치고 오르거나 산마루 능선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오르내리는 길목에서 숨이 차서 헐떡이는 불상사가 나타나지 않음은 불행 중 다행이다.

 

같은 길이라도 첫새벽에 나서면 숲속의 청아하고 순백한 공기와 잠에서 부스스 깨어나려는 초목의 민낯이 마냥 싱그러워 더할 수 없이 좋다. 아울러 나무숲의 터줏대감으로 토박이인 산새들의 요란한 지저귐에서 역동적인 삶과 사랑의 표상 같아 흐뭇하다. 게다가 행운이 따르는 맑은 새벽이면 동녘에 이글이글 떠오르는 태양의 동살이 숲속 깊은 곳까지 꽂히는 해맑은 자태의 장관은 나를 한껏 흥분시킨다. 이렇게 행복한 길섶에 요즈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한 보랏빛 싸리 꽃숭어리와 조우는 풍진에 찌든 마음까지 정갈하게 가라앉힌다. 똑같은 봄꽃이라도 향에 따라 호불호가 정확히 엇갈리게 마련인가 보다. 산등성이의 한두 그루에 이제 사 활짝 피어난 밤꽃의 진한 향이 바람결에 역겹고 고약한 향을 마구 흩뿌리는 심통을 부려 잔뜩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공자는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라면서 이렇게 설파했다고 전한다. “산은 초목이 무성하여 새들과 짐승 따위의 뭍짐승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며 생활하는 터전이다. 또한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먹거리나 쓸거리를 제공해 주는 어머니 품 같이 넉넉한 보고이다. 그런데 아무리 취해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무진장 내준다. 이 같이 산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을 끝없이 베풀고 내주기만 한다. 그러고도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돌려받으려하거나 공치사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도통 없다. 이러한 이치가 인자는 산을 좋아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이 같은 이름의 참뜻을 되새겨 본다. ‘무심한 산이지만 온갖 초목과 뭍짐승들의 삶의 터전으로 인간이 필요한 다양한 먹거리나 쓸거리를 아낌없이 내준다. 하지만 마르지 않은 영원한 샘 같기 때문에 어쩌면 어머니 품 같이 너르고 넉넉하다. 게다가 무진장 베풀고 온 누리의 다양한 삶을 품지만 스스로의 공을 내세우거나 대가를 되돌려 받으려는 욕심이 없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노블레스(noblesse) 오블리주(oblige) 철학의 본보기 역할을 너끈하게 해내고 있음이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지 싶다. 이처럼 산은 드높은 경지의 철학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산을 걸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잡다한 일상의 문제에서 비켜서서 순간적이나마 자성이나 성찰에 이르러 정신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할 따름이다. 그렇게 소박하고 낮으며 작은 바람 이상을 꿈꾸면 허황된 욕심일 뿐으로 끝내 후회만 남는다.

 

왜 걷느냐고 묻는다면 우문(愚問)이다. ‘밥을 왜 먹느냐는 질문처럼 말이다. 아마도 갓 입문한 어정잡이라면 건강을 위해서라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들먹일 것이다. 적어도 거의 매일 등산을 나선지 20여 성상을 넘긴 진정한 애호가들은 걷는 그 자체를 만끽하는 한편 조금은 결을 달리하리라.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흡사한 연유를 들먹이지 않을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비탈을 힘겹게 오로내리는 재미, 나른하고 혼곤히 밀려오는 피로를 견뎌내는 뿌듯함과 희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고즈넉한 산길을 걷는 즐거움, 맑은 공기를 맘껏 마시며 폐부를 정화시키는 호사, 울울창창한 나무숲과 대화, 봄의 화사함과 여름의 나른함을 비롯하여 가을의 화려함과 겨울의 청아한 정취에 혼을 섞는 고상한 취미 따위의 희열을 맛보는 소확행*을 위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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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확행(小確幸) : ‘소하지만 실한 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むらかみはるき)가 자신의 수필집에서 행복을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라고 정의한데서 시작된 개념이다. 한편, 이 개념은 덴마크의 휘게(hygge)나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calme)과 일맥상통한다는 견해이다.

 

찬란히 빛나던 그 계절, ()한국수필가연대 104인 대표수필선, 202042

(2019615일 토요일)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운동을 하시든 글을 쓰시든 교수님의 집중력이나 근성
그리고 자기관리가 저는 참 부럽습니다.
교수님의 최대 장점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도 참 문제인데
교수님처럼 걷고 또 걸으며 생각하는 힘을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
교수님의 새벽 등산, 너무나 부러운 일입니다.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저는 매일 새벽 달리기로 건강을 도모하고 있습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날에나 관계없이 무조건 10~11km 달립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반갑습니다, 선생님. 좋은 글도 올려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