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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난고묘소 -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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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0건 조회 881회 작성일 19-11-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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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蘭皐) 묘소(墓所)를 찾은 감회(感懷)

                                                            동진(同塵) 김재 형

 

초록 빛 짙은 유월 달 글벗 다섯이 승용차로 북부지방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떠났다.  일상생활을 벗어나 문학기행으로 견문을 넓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인들과 함께 정담도 나누고, 문학에 대한 토론으로 창작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는 기회도 되어 모두 기꺼이 참여하였다.

 이번 문화유적 답사는 기인으로 시인으로 유명한 김삿갓의 유택을 찾기로 하였다.김삿갓이 간 지 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세인들은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김삿갓의 일생이 서민과 함께 한 생활이요, 서민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눈 때문일 것이다. 

  그는 1807년 개화 초기 당대의 명문세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에 태어나 20세 약관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뛰어난 문장력을 이미 온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선천 부사로 홍경래 난에 항복한 아버지를 탄핵해 장원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불효라 통탄하면서 산천을 벗 삼아 천하를 주유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문전걸식은 생활습관이요, 언제 어디서나 심신이 피로하면 주막집 마루에 앉아 떠가는 구름을 벗 삼아 술 한잔에 시 한수로 풍류와 멋을 즐겼다. 

 그의 삶은 범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애환(哀歡)이 스며 있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이고, 독특한 그만의 인생관을 가진 위인이었다.  김병연(金炳淵), 그는 가문의 치욕적인 사실을 알고는 본명까지 버리고, 지난날의 한맺힌 불효를 씻을 길 없어 집을 나왔다. 

 하늘 아래 사는 것이 죄스러워 삿갓으로 해를 가리고, 죽장을 벗 삼아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떠돌다 5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 비운의 시인이었다.  

 낙천적인 그가 한 많고 풍류 많은 삶을 누리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체험하면서 얻은 것들은 김삿갓 특유의 풍류요, 낭만이요, 멋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그 자체가 우리 서민생활의 애환이요, 해학이요, 익살이었기에 우리들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음이 아닐까.

 김 삿갓!

그는 천하에 빼어난 문장가일 뿐 아니라 대중의 가슴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주는 세정(細情)에도 곡진(曲盡)한 분이었다. 그의 시에는 권문세도를 질타하는 장부다운 기백과 기개가 있고, 억울하고, 서럽고, 즐거워 울고 웃는 멋스러운 풍류가 있고, 불의와 사도(邪道)를 비웃는 비분강개가 있다. 그뿐이랴, 맨주먹 홀홀단신 방랑생활에도 언제나 즐거움이 있었고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여천동락(輿天同樂)의 꾸밈없는 행동과 자세는 그의 삶의 철학이요, 내일보다 오늘을 즐겁게 살아가는 생활태도는 넉넉한 그의 인품의 소산이었으리라.

 슬프다 김삿갓이여!

 위세 당당한 장동 김씨의 권위와 자존심을 어떻게 버렸습니까.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못마땅하여 집을 등졌습니까. 왜 한평생 삿갓을 쓰고 천대와 멸시와 문전걸식 떠돌이 생활로 생을 마쳤습니까. 삶을 더 누려 뛰어난 시재(詩才)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웃기고 재치와 재담과 시문을 더 많이 남겼어야했는데 애석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굴곡진 고개를 수십번 넘어 찾은 와석리 노루목 묘소 입구는 지난날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몰라보게 변모 했다. 주변은 잘 정비하여 영월군의 광관명소로 많은 인파가 붐빈다. 위풍당당 장동 김씨 명문세가의 후예로 태어나 일세의 권세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건만 죽장에 사갓 쓰고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잠시 숙연한 자세로 산자락 저 만치에 누워 있는 김삿갓의 묘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었다.

 역설적인 생각일까, 백년을 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인 것을 왜 그렇게도 무겁고 힘겨운 번뇌의 짐을 지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을까?

 외롭게 서 있는 난고 김병연지묘(蘭皐 金炳淵之墓)라는 표지석(標識石)을 보면서 김삿갓의 무덤이 어찌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하랴.  인생의 귀의처(歸依處)는 한 곳 뿐인 것을......

 누구의 무덤을 막론하고 무릇 무덤이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법이다. 일세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도 죽어지면 무덤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요. 무덤으로 변해지면 어느 무덤이나 쓸쓸하게 느껴짐은 웬일일까?.

잡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김삿갓의 무덤은 찾는 이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괜히 설봉대사(雪峰大師)의 시가  떠  오른다.

  뜬 구름은 오는 곳이 없고,       (浮雲來無處)

  가는 곳 또한 종적이 없도다.     (去也亦無踪)

  구름의 오감을 자세히 보니,      (細看雲去來)

  그것은 오직 허공뿐이구나.      (只是一虛空)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더니, 삶도 저 높푸른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과 무엇이 다르랴.  대사님의 말씀처럼 인생 자체가 뜬구름처럼 허무한 것일까.

김삿갓, 그는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설하기도    헀으리라. 그러나 남을 미워도, 원망도, 경멸도, 질시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양반의 신분으로 주어진 특권을 버리고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하고, 아픔을 대변하고, 불의에 항거하고, 야유와 천시를 외면한 채 풍유와 풍자로 인생을 마감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정 위대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위대한 인물이란 어떤 인물일까.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다르지 않으랴.

 흔히 말하길 세인들은 인류에 크게 정신적인 영향력을 끼친 분들이나 인류를 위해 커다란 업적을 남긴 분들을 일러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사리사욕과 자신의 영달을 버리고, 인류를 위해 공헌한 분을 위대한 인물이라 한다면 서민의 대변자요. 서민과 함께 한 김삿갓, 그는 만인으로부터 추앙 받을 위인임이 분명하다.

 그의 살아온 일생이, 그의 행적이, 그의 마음이, 그의 언행이 성자의 마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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