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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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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955회 작성일 20-07-1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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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윤복순

 

시계를 보니 그만 걷고 체조를 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맞춰 집에 돌아와야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어 중간 중간 체크한다. 체조를 다 마치고 시간을 보니 아까 시간 그대로다. 시계가 죽어 있었음을 그때서야 알았다.

세월 앞에 그대로 인 것이 있을까. 이건 30년쯤 됐으니 수명이 다한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동안 여러 번 건전지를 교체했다. 이번엔 새 약을 넣은 지 얼마 안 되는데 멈춘 걸 보면 약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시계방 아저씨는 분해해서 청소를 해봐야 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십오 육 년 전 외숙모가 주신 것이다. 손목시계 두 개를 가지고 오셨다. 하나는 작은 딸이 당신 회갑 때 사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막내며느리가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데 10년 근속 기념으로 받은 것이다. 맘에 드는 걸로 하나 갖으란다. 나는 휴대폰이 없어 시계가 필요하다.

딸이 사준 시계가 비싼 것인데 며느리가 준 시계를 당신이 차겠단다. 며느리랑 같이 사니 안 차고 있으면 서운하게 생각하니까.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는 당신 마음임을 내 어찌 모르랴. 덕분에 고급 시계가 생겼고 아침운동 때마다 외출 시에 잘 쓰고 있다.

외숙모와 나는 친하다. 같은 아파트에 살기도 하지만 외할머니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나의 산후조리를 맡아 주셨다. 아들딸을 데리고 외갓집에 자주 다녔다.

어머니가 큰 딸이고 외삼촌이 둘째다. 철이 든 이후로 큰외삼촌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외삼촌은 대학을 나왔는데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직장이 없었다. 많은 시간을 술로 보냈고 외숙모는 오십도 되기 전에 홀로되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외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니 외할머니도 젊은 나이에 혼자되신 것이 맞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사이가 좋았다. 동변상련이지 않았을까. 외할머니가 원불교를 지극정성으로 믿으며 강인하게 사셨던 만큼 외숙모도 당신 시모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자식들을 잘 키워 놓았다.

외할머니가 말년에 어머니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가 당신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당신 큰아들이 눈을 감았을 때는 아직 젊었고 며느리를 지켜야하고 손주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회갑을 넘기고 63세에 돌아가셨다. 부엌 앞 샘에서 넘어져 뇌수술을 받았지만 하루도 넘기지 못했다. 그때의 허무함은 할머니나 나나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동네사람들 보기 부끄럽다고 집안에만 계셨고 내가 너무 오래 산다.” 며 많은 자책을 하셨다.

할머니는 감정을 자제하기엔 역부족인 나이가 되었고 그토록 굳세고 질긴 큰 산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어깨가 축 처지고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그런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외숙모도 노인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가 한없이 보고 싶으면 성치 않으신 몸으로 나의 약국으로 오셨듯 나도 못 견디게 어머니가 그리우면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눈물바람을 했다. “느 애미는... 뭣이 그리 바빠서... ”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셨다. 내가 가면 겨우 가라앉힌 할머니의 감정을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은 외갓집에 있곤 했다.

외숙모가 나 때문에 할머니 비위 맞추기 힘들었을 터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없었다. 자주 와서 할머니랑 놀고 곁에 좀 있어주라고 했다. 할머니가 아무것도 드시지 않는다며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 번 다녀가라고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도 아무 말 없이 할머니 옆에 앉아있다 오는 게 전부였지만.

외숙모 덕분에 할머니의 마지막은 깨끗했고 외롭지 않았다. 테레사수녀만큼이나 주름이 많았지만 흉하지 않았고 온화하게 눈을 감으셨다. 외숙모는 언제나 얼굴에 부처님의 미소가 있다. 그 미소는 화를 내거나 나쁜 마음을 해지시키는 힘이 있다. 같이 있으면 저절로 편안하고 맑은 마음이 된다. 외숙모도 할머니만큼 마음고생을 하셨을 텐데 그런 미소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25년도 더 훌쩍 지났고 지금 외숙모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었다. 외숙모가 약국에 나오시지 않는다. 교당에도 안 나오신다고 한다. 외사촌동생이 교외에 주택을 지어 이사를 했다.

외숙모는 작은 딸네 손자손녀 넷을 키웠고 막내아들 손자 셋을 키웠다. 시어머니와 당신 살림을 이루었던 당신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효부인 막내며느리와 같이 산다. 큰며느리가 모시려 해도 자기네 애들 다 키워주셨으니 자기가 모셔야 한다고 한다. 외숙모는 구순을 넘겼다.

시계가 시계방에 다녀오면 한 이틀 잘 가다가 멈춘다. 그러기를 여러 번 했다. 추억을 저장하듯 서랍 속에 모셔놓고 새 시계를 꺼냈다. 그 많은 사연들을 뒤로 하고 새 것에 익숙해져간다.

오랜만에 외숙모가 지난 일요일 교당에 나오셨다고 505동 할머니가 알려준다. 여기 계실 때보다 허리가 더 굽었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아 큰 소리로 윤약국 이랑 가끔 당신 얘기를 한다고 하니 내 안부를 물으며 보고 싶다고 하더란다. 시계가 가다 서다를 하듯 당신 건강상태도 그러리라는 마음이 든다.

서랍속의 시계를 다시 꺼냈다. 이번 참에 완전 정비를 해서 새 시계로 만들어 차고 다녀야겠다. 시계가 잘 가면 외숙모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좋아질지 모른다. 시계를 차고 있으면 외숙모와 외할머니가 함께 한다. 눈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마음에서도 멀어지지 않는다.

 

2020.7.14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어쩌면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을 시계 속에는 오랜동안 세월의 흔적과 함께
외할머니와 외숙모에 대한 추억이 새겨져 있네요.
고장난 시계 말끔하게 수리해 외할머니외 외숙모의 추억 또한
오래오래 되살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책상 서랍에도 고장난 시계 두 개가 깊은 잠에 빠져있어,
지금 제대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없는 형편입니다.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제가 초등 시절 외할머니가 봄철마다 저희 집에 오시면 (아버지, 어머니는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저희 형제들을 위해 쑥을 뜯어다가 개떡을 해주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쑥떡'이라 하지 않고 꼭 개떡' 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쑥떡을 개떡이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그 시절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개떡은 최고의 간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아, 개떡 실컷 먹을 수 있구나' 했지요. 사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특별한 간식거리도 없을 때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배가 고프면 동생들하고 생쌀을 한 그릇 퍼와서 씹어 먹기도 했네요. 생쌀이 만만한 간식이었던 셈이지요.
아, 갑자기 외할머니가 그리워지는군요. 조만간 외할머니 산소에 한번 다녀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