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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가위 날 농월을 꿈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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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989회 작성일 20-10-06 07:01

본문

한가위 날 농월을 꿈꾸다가

 

휘영청 밝은 한가위의 달빛이 한사코 거실 가득히 파고 들었다. 완만한 산비탈 펑퍼짐한 언덕마루에 자리한 아파트 12층이기에 평지의 20층쯤이라서 달과 친해지기 맞춤한 높이다. 소등을 하고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둥근달이 빚어내는 오묘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볼 요량이었는데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다. 흔히들 계절적으로 한 해 중에 가장 넉넉하고 풍요로운 계절이라는 견지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한다. 하지만 산마루에 불끈 솟아오르는 만월인 보름달임에도 왠지 가슴에 찬바람이 일고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는 고향에서 뿌리 뽑혀 타지로 내몰린 현대판 디아스포라(diaspora)의 서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나잇살을 먹어가며 느끼게 마련이라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발로일까. 추석 명절의 정취에 취해 보려다가 뜻하지 않게 밀려오는 허허로운 마음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처연함으로 치달아 허둥대며 갈팡질팡했다.

 

천고성(天孤星)의 외로움을 안고 태어났음일까. 명리학에서 생월(生月)의 천고성은 스스로 고행하며, 타향으로 나가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 운이 작용한다.”던데 그런 운명을 타고 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배움을 이유로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 여태까지 부모님 곁을 떠나 타향을 전전하며 겨우 삶을 이어가는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떠돌이 세월이 어언 60여년을 훌쩍 지나면서 양친은 북망산천으로 떠나셨다. 한편 어느 결에 나는 고희(古稀) 중반을 넘긴 지금도 두 누님을 위시하여 세 여동생과 아주 멀리 떨어져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때문에 띠앗머리인 여섯 남매가 해마다 한두 차례 만나는 게 고작이라서 심한 갈증을 느끼듯이 아쉽고 외롭다.

 

가계(家系)의 관점에서 지손(支孫)이고 외아들인 까닭에 명절 때엔 양친의 차례만을 모신다. 그렇게 양친의 차례를 모시는 관계로 사촌 동생이 수도권에서 모시는 윗대의 차례에는 원천적으로 참석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추풍령 아래쪽엔 친인척이 전혀 없어 명절 때면 우리 집은 고요가 깃든 절간 같이 한적하다. 또한 설이나 추석 때 차례를 모신 뒤에 선영(先塋)에 모신 부모님이나 선조들 성묘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평소에 승용차로 오가도 왕복 10시간 가까이 소요되게 마련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언제나 되풀이 되는 지독한 교통체증(traffic jam)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아예 주저앉아서 포기하고 만다. 그런 까닭에 막상 명절날이 되면 조용하다 못해 괴괴 적적해 차례를 모신 뒤에 울적한 마음을 달랠 셈에서 동네 뒷산에 오르는 데 이골이 났다.

 

부모님 생전의 일이다. 서울에 살 때 명절에 어린 아이들과 함께 고속버스로 대전역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고향을 찾던 기억이 아련하다. 한편 서울에서 마산으로 이주하고 나서 어느 해 추석에 겪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아름아름 부탁을 해 마산발 대전행 새마을 열차표를 구입했다. 그런데 모두 4매의 열차표 중에 2매씩 다른 객실에 배정되어 있어 나와 큰아이, 아내와 작은아이가 짝을 지어 각각의 자리를 찾아가기로 했다. 얼마나 승객이 많던지 나와 큰아이는 마산역에서 승차하고 나서 밀양역에 도착했을 때 겨우 좌석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웬 날벼락이었을까. 우리 자리에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확인해 보니 수작업으로 매표한 열차표가 이중으로 발매되어 있었다. 항의하고 싶어도 입추여지가 없을 정도로 승객이 꽉 차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속수무책이기에 포기하고 있다가 대전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승무원이 눈에 띄어 항의 했으나 부질없는 하소연일 뿐이었다. 분명히 좌석표를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꼬박 서서 고생하면서 대전역에서 하차했다. 아내 역시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서서왔다며 얼마나 시달렸던지 초주검이 된 꾀죄죄한 모양새였다. 여태까지 열차를 탑승했던 경험 중에 최악의 끔찍한 사건으로 트라우마 처럼 뇌리에 남아 있다.

 

일터에서 물러나 거리낄게 없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도 훌훌 털고 다른 지역으로 둥지를 옮길 계제가 못된다. 나 혼자 같으면 40여 년 동안 살아온 삶터지만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픈 손가락 같은 변변치 못한 두 아이들이 마산을 벗어날 주변머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 몰라라 떼어놓은 채 매정하게 먼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없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전국 어디를 막론하고 마산처럼 익숙한 곳이 없다. 강산이 몇 번 변하고도 남을 세월을 작은 도시의 반경(半徑) 2km 이내에서 이리저리 옮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병원이나 약국, 맛 집이나 공공기관 따위를 찾아갈 수 있을 정도여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 두렵기 까지도 하다. 그럼에도 이곳 토박이 친구들은 나를 여전히 외지 사람이란다. 내 생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제2의 고향인데 말이다.

 

명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의 회상이다. 배움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났었다. 그런 때문에 명절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은 초등학교 졸업 무렵까지로 정지되어 있다. 따라서 6.25 전쟁의 처참한 상흔(傷痕)으로 궁핍하기 짝이 없던 암울한 시절이라서 춘궁기의 보릿고개(麥嶺期)를 넘으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다가 부황(浮黃)이 나기도 하던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고 모두가 헐벗고 가난에 찌들어 명절일지라도 너나없이 넉넉할 리 만무했다. 그런 관계로 어쩌다가 운 좋게 설빔이나 추석빔으로 새 옷을 얻어 입거나 검정 운동화 한 켤레 얻어 신으면 운수 대통했다고 여겼었다.

 

깊어가는 밤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이 무척 정겹고 따스했다. 전등과 텔레비전까지 끈 채 다가가 한가위 달을 거실로 불러들여 농월(弄月)에 흠뻑 빠지고 팠다. 신의 농간인지 간헐적으로 희뿌연 구름에 살짝 숨어들면 한결 순해진 달빛이 온 누리를 포근히 감싸며 절묘한 세상으로 바꿨다. 그러다가 구름을 헤치고 수줍은 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 때면 벅찬 감동이 절로 요동치는 황홀경을 빚어냈다. 알 수 없는 신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지동지서하다가 뜬금없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저승을 떠나신지 오래인 양친을 비롯해 여자 형제들이 그리워 울컥해지면서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 올해로 여든 여섯인 큰 누님에서부터 예순 넷인 막내까지 모두의 안부가 정녕 그립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밤이 이슥해졌기에 내일이 밝아오면 전화 인사라도 전해야겠다.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이어진 친구들 또한 궁금한 심사를 누그려 트리기 어려운 지금이다. 이는 어쩌면 지금 외롭다는 단적인 방증이지 싶다. 그렇다면 몇 삭()이 지나면 희수(喜壽)에 이르는데 이제 시나브로 철이 들며 익어가는 걸까.

 

2020101일 목요일(경자년 추석날 밤에)


댓글목록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노인은 늙어갈수록 외로움에 젖어들지만 며느리는 늙어갈 수록 상노인 시어른이 짐이 되는 세상입니다. 백살을 느끈히 넘기고도 팽팽하신 노인들 보면 누군가 삼시세끼를 챙겨드리기에 저리 정정하게 오래 사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샘, 외롭죠? 몸은 자주 갈 수 없지만 전화는 할 수 있잖아요. 모두 외로우니 전화라도 자주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