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편안한 유택을 꿈꾸며 > 자유창작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7247_0788.jpg 

수필 편안한 유택을 꿈꾸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986회 작성일 20-03-11 12:14

본문

편안한 유택을 꿈꾸며

 

어제 일요일(324: 기해년 음력 218) 부모님의 묘를 이장했다. 그 동안 당신들이 마련했던 밭머리와 맞닿은 선산자락에 살아생전 치표(置標)해 두었던 자리에 묘를 쓰고 우금(于今)까지 관리해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이장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최근에 선산을 측량했던 결과에 따르면 부모님 묘지의 한쪽이 이웃한 다른 묘지를 점유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는 귀띔이었다. 한편, 세월이 지나면서 묘지관리나 벌초 따위를 감당할 후손들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전향적인 대처가 절실하다는 고민을 거듭해왔다. 이런 난제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편안한 유택을 마련해 드릴 요량으로 문중에서 조성한 합동묘역으로 이장을 굳혔다.

 

내 씨족의 갈래는 청주 한문(韓門) 공안공 할아버지 후손으로 오래 된 선조들을 비롯해 선친의 항렬인 33세손까지 관리해야 할 묘지가 벅찰 정도여서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선산에 계단식 합동묘역을 조성하여 시나브로 조상들의 묘를 이장해왔다. 이장할 때는 반드시 내외를 합장해야 하며, 묘역의 넓이와 크기 또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한편, 벌초 과정에서 예초기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묘 앞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합동묘역의 각 계단마다 가장 오른쪽에 유택의 주인들에 대한 인적사항만을 요약해 새긴 오석 하나를 세워 두기로 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유택이 자리한 계단의 마지막 자리까지 묘를 쓰게 된다면 한분 한분에 대해서 한자(漢字)로 세로쓰기한 두 줄에 청주한공휘균희/배김녕김씨/지묘(淸州韓公諱均熙/配孺人金寧金氏/之墓)”라는 식으로 오석에 새겨지리라.

 

이장 하루 전날 대전역 앞의 중앙시장에서 아우들을 만나 자질구레한 준비물을 구입할 때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내리다가 그치려니 했는데 점점 심해졌다. 그러더니 부모님의 산소에 도착할 무렵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내려앉고 돌풍과 함께 함박눈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휘몰아쳐 몹시 심란했다. 동행했던 사촌과 다른 아우도 당황스럽기는 나와 마찬가지였으리라. 비나 눈이 내리는가 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취소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어도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라서 암담했다. 몇 가지 준비를 마치고 동행했던 두 아우들은 각자 대전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올해 여든둘에 이른 둘째 누님 댁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누님과 대화를 나누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내일 일이 걱정되어 밤새도록 거의 뜬 눈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대전에서 이른 새벽에 서둘러 출발한 사촌이 여섯시 반쯤에 도착해 부모님의 유택을 향해 길을 나섰다. 새벽녘 바깥 날씨는 상상 이상으로 매서웠다.

 

당신들이 생전에 최고의 명당이라면서 스스로 치표를 했던 유택이 분명하다. 그렇게 흡족한 자리에 누워 계신 분들께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숱한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이장을 생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지 못하고 좌고우면을 거듭했다. 그렇게 마냥 뭉그적대다가 영영 기회를 잃고 후회할 것 같아 딴에는 용단을 내렸던 것이다. 대략 아침 일곱 시 반 무렵 아버님의 묘에 이어 어머님의 묘도 포클레인으로 파헤친 다음에 석관을 열고 살폈다. 처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유골 수습을 위해 조심스럽게 흙을 긁어내며 자세히 살피니 이게 웬일인가. 실낱같은 감나무 뿌리가 석관 안으로 들어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특히 어머니 석관 안에는 심할 정도라서 놀랐다. 아마도 어머니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고목인 감나무 한 그루가 원흉이었다. 정성을 다해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까맣고 흉한 몰골의 감나무 뿌리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작업이 꽤나 까다롭고 시간이 수월찮게 걸렸다.

 

내키지 않았을 나무뿌리의 불법 침입에 얼마나 맘고생을 하셨을까. 제멋대로 뻗어나며 친친 감겼던 몹쓸 뿌리를 모두 정리하고 나서 어머니의 머리 유골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깨끗한 유백색을 띈 채 환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웃고 계심이 선연했다. 몸에 찰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께름칙했던 뿌리를 말끔히 제거해 드렸고, 정갈하고 반듯한 새로운 유택을 마련했으며, 어두운 저승에 머물던 당신들을 밝은 이승으로 초대해 조우할 기회를 만들어 줘서 꿈만 같이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에 가슴이 울컥하고 콧잔등이 시큰했다. 진정 이장은 걸출한 결정 같다. 만일 영원히 그 자리에 방치했다면 마귀 같이 흉측한 감나무 뿌리의 무례한 행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시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며 전전긍긍하셨을까.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내가 결정한 가정사 중에서 가장 탁월한 처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의 새로운 유택이 자리한 합동묘역 풍경이다. 지형은 좌청룡우백호 지형에다가 계단식으로 다듬어진 묘역에는 제일 윗대에서부터 차례로 모시고 있다. 그런 까닭에 아직까지는 선친의 항렬이 가장 밑이다. 듬직한 선조들의 끝없는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맘껏 꿈을 펼치면서 희망을 노래하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조석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모두가 한결같이 윗대의 조상들뿐이라서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 한 번 제대로 펴거나 숨 한 번 편하게 쉬지 못하는 어려움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저승의 법도나 이치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숙맥의 처지에서 생각이다. 따스한 영지에 마련된 새 유택에서 합장하고 시작하는 새로운 세상은 이승에서 신혼부부의 삶에 비견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부모님의 핏줄을 이어받은 동기 여섯과 유일한 며느리인 아내가 함께 자리를 해 뜻 깊었다. 아울러 경향 각지에서 힘을 보태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 준 문중의 형, 아우, 계수들께 고맙고 죄송하다. 게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소문을 들었던지 초등학교 동창인 전직 L교장이 홀연히 찾아주었다. 그는 퇴임 후에 일구월심으로 갈고 닦은 풍수지리 지식을 바탕으로 지관 역할을 자청해줘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아울러 토요일인 그저께의 불순하기 짝이 없던 변화무쌍한 날씨와 달리 일요일인 어제의 날씨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화창한 늦봄 날씨를 방불케 할 정도로 쾌청하고 푸근해 하늘의 축복이 내린 분위기였다. 이 같은 하늘의 은총과 일가친척의 곡진한 성원과 울력이 어우러져 진행되었기에 내 부모님의 이장은 무한한 축복이며 사랑이 넘쳐나는 가족행사로서 흡족했고 마냥 기뻤다.

 

문학공간, 20202월호(통권 363), 202021

(2019325일 월요일)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이전 홈페이지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아직 그곳에다
새 홈페이지 공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이전 홈페이지 거의 14년 동안 지켜주셨는데
이곳에서도 변함없이 함께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새 홈페이지로 이전 하고 보니
교수님의 더욱 큰 힘이 느껴집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큰일 하셨네요.
지관 역할을 해주신 친구분이 있어서
아주 든든했겠습니다^^

임영숙님의 댓글

임영숙 작성일

교수님 새 홈페이지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교수님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