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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겨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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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래여 댓글 2건 조회 1,083회 작성일 20-12-1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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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일기

   박래여



 

 단감을 도매상에 올리는 날은 새벽부터 완전무장을 한다. 저장고에 든 단감을 꺼내 혹시 언 것이 있는지, 못난이가 섞였는지, 무른 것은 없는지, 매의 눈이 된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고공 행진하는 단감 가격에 타격을 입는다. 알감으로 출하를 해버리면 편한데 막 쏟아지는 수확 철에는 가격이 낫다. 일 년 농사지어 투자 금 회수도 힘들 정도의 가격이라 우리 동네 단감농가는 저장을 했다가 수확기 끝난 후에 조금씩 도매상에 올린다. 도매상에서 화물차를 보내주기 때문에 편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독점계약이라 장단점이 있다. 작은 티 하나에도 가격 차이를 두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다섯 개들이 단감 봉지에 한 개라도 문제점이 발견되면 뜯어서 재포장을 한다. 손가락이 얼얼하고 뱃속이 시릴 정도다. 밝은 형광등 아래 촉수를 곤두세우고 하는 일이라 농부도 나도 신경이 예민하다. 문제의 단감을 발견하면 ‘어떤 게 문젠데? 괜찮은 것 같은데?’하다가도 농부가 발견 못한 것을 지적하면 확인사살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다. 예리하게 살피지 않으면 작은 티는 발견하기 어렵다. 소문날 정도로 맛있는 단감인데 불량품이 나오면 속이 상한다. 돈과 직결되어 그럴까. 단감 한 개 키우느라 일 년 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서 그럴까. 사람 손이 하는 일인데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 대범한 척 하다가도 조바심을 낸다.



 “당신은 가서 밥이나 차려라. 밥 먹고 하자.”

 뜬금없이 밥 타령하는 농부가 밉상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처럼 집안을 들락날락 하면서 느슨하게 구는 것도 못 마땅하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해도 실수가 나올 판인데. 속이 부글부글 괴지만 입 꾹 다물고 작업만 했다. 재차 밥 타령을 하기에 옷의 먼지를 털고 작업장을 나선다. 그 새 날이 환하게 밝았다. 시계를 봤더니 늦은 아침이다. 배고플 때도 됐군. 그제야 농부를 이해한다. 농사꾼은 아침을 일찍 먹는다. 특히 작업하는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설치기 때문에 평소보다 밥 때가 빠르다. 배고픈 것은 못 참는 사람이다. 그러니 들락날락하면서 막걸리로 속을 풀었구나.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면 배고픔도 못 느낀다. 일이 끝날 때까지 집중한다.



 오래 함께 산 부부는 표정만 봐도 서로의 속내를 안다. 내 천자 그려진 내 얼굴만 봐도 심통 난 것을 알았을 것이다. 추운 작업장에서 한기를 마셨으니 속을 따끈하게 해 줄 국물이 꼭 필요하다. 황태를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콩나물을 넣고 대파와 청량고추, 달걀 두 개를 풀어 얼큰하게 끓였다. 술국으로 제격이다. 밥상을 차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여보, 밥 드시러 오세요.’ 기분 좋은 톤으로 목소리에 애교까지 담아서. 농부도 기분이 상했는지 첫 부름에 화답을 않는다. 목소리를 더 높였다. ‘막걸리도 따끈하게 데울까? 밥 먹고 하자.’ 그제야 ‘알았소.’ 대답한다. 내게 높임말을 쓸 때는 속이 상했다는 뜻이다.



 황태 국 덕에 농부의 꽁한 속도 풀렸는지 표정이 밝다. 어제 온종일 명상센터 봉사활동으로 목수일 중노동을 하고 왔으니 몸이 오죽 고단할까. 단감 작업만 아니었으면 이삼일 보내고 올 텐데. 반주로 소주를 찾는다. 소주 두 잔을 거푸 마시더니 한숨 자야겠단다. 농부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작업장으로 향했다. 하던 일은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다. 저장고에 단감을 넣어둔 컨테이너 박스를 꺼내 손수레에 싣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대여섯 박스만 채우면 오늘 작업량은 끝이다. 농부가 쉴 동안 마무리를 해 놓으려고 혼자 북치고 장구 쳤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비록 성인병으로 시들시들하지만 일 앞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런 나를 농부는 못마땅해 한다. 천지 분간도 못하고 몸을 혹사한다고. 성격인 걸 어쩌라고. 대꾸하지만 나쁜 성격이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젊어서는 일이 겁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몸을 사리는 편이다. 내게 버거운 일이다 싶으면 아예 시작할 생각조차 않는다. 막상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싶어 시작을 하면 끝장을 봐야 한다. 일을 깔끔하게 끝내놔야 쉰다. 단감을 화물에 실어 보내고 뒷정리를 하고 나니 점심때다. 밥 차리기 귀찮아 짜장면이나 먹으러 갈까 싶었지만 코로나19도 걸린다. 농부는 이웃 친구에게 같이 점심 먹자고 한다. 그 친구가 다른 약속이 있다는 바람에 외식의 유혹은 김샜다.

 “라면 끓일까? 나가는 것도 귀찮은데. 밥도 있고.”



 그렇게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오전 내내 종종걸음 쳤지만 배고픈 줄 모르겠다. 농부는 실눈을 뜨고 내 눈치를 살핀다. ‘저를 때는 피하는 것이 상수지.’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이층으로 줄행랑을 친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그제야 쉴 참이다. 문서란을 편다.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하면 나는 삼매경에 빠진다. 시간도 잊고 잡념도 없다. 오직 문서란의 백지와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 나를 감싼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농한기에도 감 출하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네요. 지내시는 삶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 보면서 그 또한 몹시 신경이 씌이지 싶습니다. 혹여 한두 개의 불량품이 섞이면 멀쩡한 상품까지 도매금으로 낮은 가격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에서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연말 되시길 기원합니다.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꽁꽁 얼어붙는 날이 이틀 째 계속됩니다. 저장고의 온도가 낮아지는 것이 신경을 곤두서게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은 늘 한결같은데 나잇살만 늘어나는 현실입니다. 선생님, 벌써 퇴직하신지 십 년이군요. 글밭 일구며 혼신을 다해 노후를 사시는 모습을 엿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