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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다시 포도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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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1,022회 작성일 21-01-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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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포도밭에

윤복순

 

다시 포도농사를 짓는다. 아니 벌써 농사는 시작되었다. 벌레 특히 꽃매미가 들어가지 못하게 쳐 놓았던 모기장을 내렸다. 많은 눈이 내리면 하우스가 주저앉기 때문이다. 1~2월에 자르기 쉽게 포도가지를 묶어 놓은 클립도 풀었다.

밭에 풀이 많이 자라 너풀너풀한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오랜만에 밭에 갈 일을 생각하니 작은 흥분이 인다.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 마냥. 내가 농삿일하는 것 이래 좋아했나 싶다. 농사지을 땐 힘들었지만 안식년으로 1년 쉬니 밭에서 일하던 것도 포도나무도 그립다.

10월 중순부터 태양광 공사가 시작됐다. 아래 밭의 포도나무를 다 캐내고 비닐하우스를 철거했다. 태양광시설 서류를 넣고부터 3년여가 되었으므로 기다리기도 지쳐갔다. 사업자등록증이 나왔는데도 시설허가는 쉽게 나지 않았다. 막상 공사를 시작하니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남편한테 보고만 들었지 공사 진행과정을 보지 않았기에 밭에 가는 것이 더 기대되었다. 공사가 완료되고 난 뒤에도 발전에 필요한 서류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사업하기엔 규제도 많고 준비서류도 많다고 하더니 이번 참에 실감했다. 오늘 내일 발전 시작한다고 한다.

일요일, 호남 서해안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풀 뽑는 일이야 하우스 안에서 하니 비가와도 상관없다. 일요일 마다 함라산 둘레길이나 탑천의 뚝방길을 걸었는데 밭에 일을 하러 가려니 설렌다. 비가 온다고 해서 서둘렀다.

상전벽해라더니 포도밭이 태양광 시설로 꽉 찼다. 하우스를 뜯어내니 더 넓어 보인다. 보무도 당당하다. ~ 박수를 쳤다. 인터넷에서 태양광 해 봐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었다. 엄청나게 적자여서 계약기간이 다 지나도 투자금액을 못 건진다는 내용이었다. 적자든 흑자든 나는 남편 일이 줄었다는 것이 좋다.

남편이 명예퇴직 후 포도농장을 시작한 이래 힘에 부치게 일을 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농사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비닐하우스 짓는 일이 큰 공사인데 농장이 산업단지로 들어가는 바람에 두 번이나 했다. 농사 끝나면 체중이 10Kg정도 줄어든다. 어떻게 하면 일을 줄일까 고심했는데 태양광이 완공되었다.

위 밭으로 갔다. 잎이 다 떨어진 포도나무는 쓸쓸해 보였다. ‘오래만이다. 내가 오늘 너희들과 놀아줄게. 너희들도 내가오니 반갑지큰소리로 인사부터 나눴다. 포도나무들도 웅성웅성 인사를 한다. 풀 다 뽑아줄게 겨울 잘 버텨. 봄부터는 매 일요일 마다 올게. 나는 포도농사에 지식이 없어 풀 뽑기 외엔 도와줄 일이 별로 없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밭으로 출근한다. 관리사가 태양광 시설에 들어가서 다시 지어야 한다. 일꾼을 사고 싶어도 코로나19 때문에 목사님과 둘이서 한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포도밭은 40% 정도 남았다. 하우스 14동이다. 이 정도면 몬당할 것 같아 마음이 가볍다. 가을에 날씨가 좋아서 인지 겨울 풀답지 않게 포기가 차 한두 번 호미질로는 뽑아지지 않는다.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슬슬 지쳐간다.

철푸덕 앉아 버렸다. 1년 내내 일을 하지 않았더니 다리도 팔도 녹이 슬었나 보다. 하지만 금방 내 몸이 기억해 낼 것이다. 10년 넘게 한 일인데. 풀을 뽑는 동안은 잡생각이 없다. 풀이 뽑아진 밭처럼 머릿속도 깨끗하다. 앉았다 일어날 때 허벅지가 당기는 듯하고 약하게 근육통이 느껴지는 이 기분이 좋다. ‘이것 봐라 그까짓 호미질 좀 했다고 당장 표시를 내네.’

정신이 육체의 피로정도를 즐기고 있을 때 공사장 소음이 들렸다. 일요일은 대부분의 일터가 쉬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포도밭 주변도 농한기라서 남편과 나밖에 없는데. 새로 지으려는 관리사에서 일하던 남편이 달려온다. “여보, 오늘 발전 시작한데.” 그 공사 소리였어. 일요일에도 일을 하나보네. “당신 있을 때 해주려고 그러나 봐.” 평평하던 모듈이 남쪽방향으로 비스듬히 뉘어졌다. 20년 동안 잘 해보자, 그리고 고맙다. 기도를 했다.

밭으로 돌아와 풀을 뽑았다. 여름 소나기 같은 비가 쏟아진다. 비닐하우스에 내리니 그 소리가 몇 배는 더 요란하다. 나쁜 일은 다 물러나고 좋은 일만 있으라고 사물놀이공연을 해 주는 것 같다. 어느 축하객이 이 보다 더 신나게 축원을 해줄까. 나도 풀 뽑기를 멈추고 비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의식을 행하듯.

모듈에 붙어있는 흙먼지를 깨끗이 씻어주려는 듯 때맞춰 비가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야 태양광을 하는 것은 늦었다고, 적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잘 될 것 같은 예감에 빗소리만큼이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남편도 이 비는 우리 태양광의 개통을 축복해 내리는 비라고 한다. ‘나도 금방 그렇게 생각 했는데.’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우리는 친환경 모듈이라서, 농민이라서 다른 사람보다 계약을 조금 높게 했다고 한다.

혼자서 하우스 여덟 동을 마쳤을 때 남편이 합류했다. 농사일도 부부가 같이 하면 전혀 힘들지 않고 즐거울 것 같단다.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면 의견충돌 날 일이 많아져 나는 반대한다. 일주일 내내 실내에만 있다가 일요일 밭에 오니 즐기면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약국을 그만 두길 원한다. 나는 앞으로 10년은 더 하고 싶다. 농부는 요새말로 나의 부캐(부 캐릭터).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체력도 떨어졌다. 바람까지 세게 분다. 오늘 못한 것은 남편이 내일 혼자 뽑겠다고 어서 가자고 한다. 마저 끝내고 가자고 우겼다. 힘들어서 노래까지 불렀다. 풀이 쑥쑥 잘 뽑아진다. 다 끝내고 나니 허리가 쭉 펴지지 않았지만 기분은 하늘이라도 날 것 같다.

봄이 되면 태양광은 더 많이 돌아갈 것이고, 밭은 줄어 일하기에 맞춤 맞다. 포도밭에 가는 일이 기대된다.

 

2020.12.17


댓글목록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2021년이네요.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빌어요.
코로나19가 빨리 진정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1년  동안 안식년을 가지신 것으로 아는데, 이제 다시 포도 농사를 시작하시네요.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셨겠지만, 포도밭 일부에 태양광 발전 시설로 변경하는 공사를 마치신 것 같네요. 하기야 요즈음 농사일을 할 일꾼을 구하기 어려워, 농사를 포기하거나 다른 용도로 농지 용도를 변경하는 예가  허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튼 남은 포도 농사도 잘되고 태양광 발전도 순조롭게 진행되길 기원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