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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80년대 인생 시골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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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외숙 댓글 1건 조회 1,105회 작성일 21-01-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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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인생 시골 이웃들

신외숙

 

 

유투브에서 80년대 동영상을 시청했다.

시골 오일장을 보고 돌아오는 여인네들의 정담(情談)과 훈훈한 인심이 뭄어나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와 어우러져 농촌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다. 이웃 간의 대소사를 알리며 식사하러 오라는 말투가 여간 정겨운 게 아니다. 호숫가를 끼고 도는 시골 버스는 먼지를 잔뜩 뿌려 놓고는 한적한 길가에 승객들을 내려놓는다.

흙길을 걸어 개울물을 건너는 시골 풍경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잿빛으로 허허롭지만 농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창호지 문밖은 곧바로 마당이고 시골 길이다.

그 길가를 걸어가며 동네의 소식통이 이어진다.

동네에 환갑잔치가 열린다는 소문이다. 잔치 규모를 줄이기 위해 굳이 생일잔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동네잔치라고 한다. 여인은 그 동네 잔치를 위해 오일장에 들러 안줏거리와 과일 소고기 국거리를 장만했다며 돈의 가치가 떨어졌다며 말한다.

여인들은 옷매무새가 거칠고 색상이 바래져 있다. 늦가을임에도 두터운 외투를 걸쳤거나 작업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파머 머리에 누비 한복을 입은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간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개울물을 지나 교각을 지나는 마을 여인네들.

생일 잔치 오라며 오가는 동네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건넨다. 흙길을 걷는 동안 동네 청년들과 인사를 하며 식사초대를 한다. 메뉴는 잡채에다 감자 부침개 국거리에다 찹쌀떡 등이다. 산등성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골 동네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오른다.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는 현 세태에 비하면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비밀이 보장 안 되는 시골 인심이라지만 그래서 더 이웃 간의 소통으로 풍요로운 시골 인심이었다. 계산하지 않는 넉넉한 인심과 베풀어주는 마음 씀씀이를 이제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세월 따라 요즘 시골 인심도 많이 변했다. 옛날보다 더 텅빈 듯한 농촌은 아예 인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농민이 귀한 세상이 되었다. 허름한 농가(農家)는 단촐하고 세련된 주택으로 변했고 경운기 대신 승용차가 마당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정감어리게 느껴지던 시골 풍경이 곳곳에 음식점이 들어서고 관광지로 대거유입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자연을 빙자한 포장된 인공미가 돈벌이를 위한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산이 절반이나 깍여져 나간 모습을 보면 공연히 울화가 치민다. 교통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여행하기가 쉬워졌다.

산을 뚫어 만든 터널로 거리는 최소로 단축되었고 운행 시간도 엄청나게 줄어 여행 하기는 좋아진 셈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한적한 시골 정경을 보면서 여행을 즐기던 재미는 사라져 아쉽기만 하다.

작년 이맘 때쯤 강원도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역은 내가 20대 중반 때 머물렀던 곳이다. 80년대 초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도농(都農) 간의 차이가 뚜렷했다. 생활 모습은 물론이고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가 났다. 남존여비가 바로 그것이었다.

여자의 희생으로 가정이 이루어지던 그때는 일제나 조선시대 말기 현상 같았다. 어찌나 사고방식이 고루한지 여자는 그저 희생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희생 속에 선하고 너그러운 인심이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위무(慰撫)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하고 답답한 시골 생활을 견디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일찍이 시골생활을 동경 했었지만 그렇게 답답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시골 동네를 벗어나 봐야 갈 곳이 없는 것이 그곳의 특징이었다. 특히 추수가 끝난 초겨울이나 씨 뿌리 직전인 이른 봄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닐 조각이 밭에 날아다니고 벌판은 쓸쓸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했다.

30년이 훨씬 지나고 40년이 가까워 다시 그곳을 방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천지가 개벽을 해도 열 번은 더 했을 그곳은 예전보다 인구가 더 줄어 아예 인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신축한 건물이 있는 걸로 보아 분명 사람 사는 동네는 맞는 것 같은데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곳은 군 주둔 지역이라 언제고 군복 입은 군인이 보였었는데 말이다. 흙길은 아스팔트로 포장 돼 있었고 좁은 개울 물가도 교량이 세워져 거리가 단축돼 있었다. 학교 건물도 신축된 채 유치원까지 병설돼 있었다. 읍내 거리는 말할 것도 없이 변모해 있었는데 옛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오일장이 열리던 전통시장은 삼분의 이 이상이 폐점 상태였고 이 역시 인적이 드물었다.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으로 형성된 상가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거리가 단축된만큼 상가는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더구나 일반 사병들의 대한 파격적인 조치로 상가지역은 아예 파탄지경이었다.

그들의 외침은 아예 인터넷에서도 거론되지 않았고 대책도 전무한 실정이었다. 또한 교통 수단도 줄어들어 예전에 소양강에서 출발하던 쾌속선이 사라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했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산과 논밭이었다. 도로도 흙길에서 아스팔트로 변했고 군내버스도 소형 마을버스로 변해 운전기사가 직접 요금을 받고 거슬러 주었다.

군 부대 장소나 명칭은 그대로 살아 있어 그나마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밭이 사라지고 축사로 변한 곳도 있었고 몇 안 되는 학교는 대부분 신축해 산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마다 존재하던 시골 점방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 전체가 사라진 곳도 있었다.

마을 이름은 존재하는 것 같은데 면사무소 근처에 존재하던 동네가 사라지고 도로가 형성돼 있었다. 막국수로 유명하던 시골 음식점도 간 곳 없이 사라졌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옛 추억은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옛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간 실망할 게 자명해 더 이상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옛 기억을 찾아 그때의 지인(知人)들을 만날 용기도 없다. 변한 게 어디 환경뿐이겠는가. 사람 마음도 세월 따라 변하고 상흔이 끼었겠지.

그러나 추억은 마음속에서 전혀 변색되지 않는다. 추억은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힘든 인생여정을 미소 짓게 한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소설 여행을 떠난다. 내 꿈의 산실이었고 소설 속의 한 장면이었던 장소를 향해, 가만히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모두가 변하는 세상이기에 농촌도 예외가 될 수 없겠지요. 몰라보게 달라진 외양만큼이나 인심이나 사람들도 변한게 현실 같습니다. 그래서 어딜가도 옛의 정취를 찾을 길이 없어 허허로운 마음을 다잡을 수 없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변치 않은 것은 산천과 농사를 짓는 전답 뿐이라서 상실감에 지난날을 더 그리워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최근 베트남 소수 민족을 찾는 기행 프로그램에 나타나는 모습이나 생활상을 비롯해 푸근한 인심에서 지난 세월 우리네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경 빠져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이제 추억 속에 묻어두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