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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입춘에 묵은지 만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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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래여 댓글 4건 조회 1,201회 작성일 21-02-0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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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묵은지 만두로

        박래여

 

  입춘이란다. 매화가 피는 것을 보니 봄이 온 것을 알겠지만 체감 온도는 아직 겨울이다. 한파는 아니어서 골짝 호스 얼까봐 마음 졸일 일은 없다. 입춘 맞이 대청소를 했다. 겨우내 아들이 해 주던 청소를 직접 하려니 아들 생각이 간절하다. 며칠만 기다리면 설 쇠러 올 것이다. 코로나로 뒤숭숭한 나라지만 두 노인이 건재하니 설 준비는 해야 할 것이고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부터 되다.

 

  김칫독에서 묵은지 두 포기를 꺼내 닭장 옆으로 간다. 닭장으로 흘러가는 물은 맑고 깨끗하다. 물통에서 한 가지 빼 낸 호스를 타고 내려오는 골짝물이다. 물줄기가 약하다. 툭툭 털었더니 막혔던 구멍이 뚫렸는지 물이 콸콸 흐른다. 그 물에 묵은지를 헐렁헐렁 씻었다. 닭들은 저희들 먹인가 싶어 창살을 뚫고 나올 듯 조리방정을 떤다. 양념을 다 씻어낸 묵은지의 민낯은 깔끔하다.

 냉장고에 든 것들을 꺼낸다. 두부, 참치, 돼지고기, 청양고추, 버섯, 달걀, 대파, 마늘 다진 것 등이다. 묵은지 한 포기는 대가리만 끊어 물을 짜고, 한 포기는 다졌다. 돼지고기 대신 참치만 넣기로 했다. 기름을 꾹 짜냈다. 두부도 마른 행주에 싸서 물기를 없애고 청양고추와 버섯과 대파도 다졌다. 준비된 것을 양푼에 몽땅 담고 주물렀다. 달걀 두 개와 찹쌀가루도 적당히 넣었다. 감자가루를 넣어도 괜찮겠다. 양념장도 만들었다. 점심 반찬은 김치만두다.

 평생 부엌을 못 면하고 살아온 나는 삼시세끼 차리는 것에 진력을 내지만 가끔 특별 식을 만들곤 한다. 마음 내키면 한다. ‘자주 좀 해 주지.’ 농부가 불만스러워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재미없다.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재미지다. 음식을 할 때는 그 음식에만 정신을 쏟는다.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요리도 종합예술이고 글도 종합예술이다. 요리할 때의 나와 글을 쓸 때의 나는 닮은꼴이다.

 틈새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날마다 쓰는 글이다. 내 삶을 반추하는 것에 만족하는가. 아니다. 좀 더 깊은 심오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으나 능력 밖이다. 소소한 일상이 삶이다. 톡톡 누군가 북창을 두드린다. 직바구리다. 창에 발가락을 착 붙이고 먹이를 쪼고 있다. 거미집일 때도 있고 사마귀집일 때도 있다. 삶의 고리는 적자생존이다. 사람이 일평생 먹고 사는 것에 주력하듯이 곤충도 동물도 식물도 먹고 살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틱낫한 스님의 <구름속의 외딴집>을 읽었다. 소설이라기보다 동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스님의 책을 접한 지 꽤 오래 되었다. 법정스님과 틱낫한 스님의 책은 무엇이든지 찾아서 흡입한 적도 있다. 소박한 스님의 삶을 닮고 싶었기 때문일까. 마음의 산책을 할 수 있는 독서가 좋아서일까. 마음의 여유를 잃고 물질세계에 탐닉하는 사바세계 사람들에게 스님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베트남에 전해져오는 죽림선사와 경보 공주의 삶을 조명한 허구지만 스님의 메시지는 하나다.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살아가라는. 모든 사람이 스님은 될 수 없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가. 촌부로 자리매김하며 살고 있는 나는 가끔 내게 반문한다. 내가 원하던 삶인가. 내가 원하지 않던 삶인가. 전원생활의 낭만에 젖어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삶을 지향한 것은 사실이다. 농부를 반려자로 택한 것도 도시 삶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였는지 모른다. 농촌의 삶은 내가 그리던 전원생활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지만 나는 나를 버리지 못했다.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나를 곧추세우며 살았다는 것을 환갑진갑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점심시간이다. 서둘러 만두 속을 묵은지에 쌌다. 찜통에 가지런히 담았다. 가스 불을 켜 놓고 식탁에 앉아 필립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소설책을 폈다. 예순이 넘은 교수이자 문화평론가로 유명세를 타는 남자가 스물 네 살의 어린 제자에게 느끼는 욕망과 늙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성찰한 소설인데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문장과 단어가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면 좆이란 단어다. 번역자가 임으로 쓴 우리말이겠지만 문장 표현에 효과적이지 않았나 싶다.

 묵은 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낮춘다. 흘깃 벽시계를 봤다. 열두 시 반이다. 새벽형인 농부도 많이 편해졌다. 밥 때문에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 늦은 아침을 먹고 일터로 갔으니 점심시간은 여유롭다. 올 때가 됐다. 점심상을 차린다.

 요즘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다. 노동을 하는 농부는 간단한 반찬으로 밥을 먹지만 집에 있는 나는 과일주스나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다. 대신 점심은 정성을 들인다. 묵은지 만두와 순두부찌개, 김치와 시금치나물, 멸치 볶음이지만 밥 한 공기 먹기엔 많은 반찬이다. 소식이 몸에 좋단다. 나는 다이어트가 필수 항목이지만 워낙 잘 먹는 대식가라 포기한 상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먹성이 조금씩 준다. 과식하면 속이 불편해 고생을 한다. 적게 먹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면서 음식에 대한 욕심도 줄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증도 없어졌다. 공복감을 없애기 위해 밥을 먹는 셈이다. 하루 두 끼만 먹으니 몸이 가볍다. 일철에는 삼시세끼를 먹고 새참까지 먹어야 기운이 나지만 지금은 내게 농한기다. 나이 탓일 수도 있다. ‘음식이 맛있을 때가 한창이다. 늙어봐. 속에서 안 받아.’ 노인들이 그랬다.

 만두 속이 익었는지 살피려고 한 개를 꺼내 반 토막으로 잘랐다. 매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의외로 괜찮다. 참치보다 돼지고기를 다져넣는 것이 한 맛 더 나겠다. 양념장도 필요 없다. 묵은지 간만으로도 제격이다.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호호거리며 만두를 먹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녀왔습니다.’ 농부의 활기찬 목소리에 대답도 못할 판이다.

 “당신도 양반은 못 되겠다. 혼자 맛보는 중인데.”

  “많이 드소.”

  “당신도 아~~”

 농부의 입에 뜨거운 묵은지 만두 반쪽을 넣어준다. 둘이 살면서 속없는 농담도 하고 해학도 풀어야 하루가 짧다. 늙어가는 남자가 자식 같은 딸에게 욕망을 느끼는 소설도 읽어가며 죽은 감각을 살려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고요하게 앉아 내면을 성찰하기 좋은 명상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뜨거운 만두를 먹고 학학 거려 볼 일이다.

 


댓글목록

신외숙님의 댓글

신외숙 작성일

먹고 싶어서 침이 꼴까닥 넘어 갑니다. 얼마나 맛있을까. 도심에서는 꿈도 못 꿀 행복한 일상입니다. 부럽습니다.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행복한 일상이 됩니다.^^ 몸보다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에 시간에 좇기는 삶이 아닌가 싶을 때 있습니다.
농번기가 시작되면 농촌도 바빠져요. 지금은 농한기, 빈둥거리다 먹을 것만 챙겨요.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치만두 만들어보세요.^^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몇 군데 보낼 원고가 밀려 정리해 메일로 보내고, 손주와 점심 자장면으로 때우고 산에 갔다고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집콕하느라 세월 가는 줄 잊었던가 봅니다. 오늘이 입춘이라는 사실을 가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네요. 다른 것은 깡그리 잊고 지내지만 토요일은 아내가 점검 받기위해 병원 야하고, 손주가 치과병원 예약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직은 이라고 생각해도 계절의 봄은 저만큼 왔나 봅니다. 마음 속으로 입춘 방 "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써서 마음 속 우리집 대문에 붙여 봅니다. 현실은 아파트라서 붙이기 쑥스러워 한 번도 붙여보지 못했답니다. 늘 보람되세요!!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연세가 높아질수록 병원 다니는 횟수가 느는 것 같아요. 돈 모아놨다 병원에 다 갖다 바친다는 노인들 말이 빈말이 아니란 것을 느낄 때 있어요.
선생님, 건강 잘 챙기세요.^^ 저도 현관에 붙이던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몇 년전부터 하지 않습니다. 노인이 써 주면 붙였는데. 울 시부께서 붓을 놓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