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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정신이 가난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1,187회 작성일 21-02-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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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가난한

윤복순

 

어느 작가가 이 시의 힘으로 폭설과 한파를 견디고 위로를 받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나도 좋아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눈으로만 읽다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그저 그런 날이었는데 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503동과 507동 사이로 보이는 걸게 그림을 걸어 놓은 것 같은 하늘을 한 없이 바라보았다. 무엇 땜에 하늘 보는 것도 잊고 살았을까. 오랜만에 하늘을 봤는데 산뜻하고 푸르다.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순수하고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었다. 이 분위기를 좀 더 만끽하고 싶어,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한껏 멋을 내 낭송을 해 보았다.

눈이 오면 오늘도 교통사고 많이 나겠다, 비닐하우스 피해는 없어야 할 텐데, 우리 태양광발전 하나도 안 돌아가겠네, 약국 안은 얼마나 더러워질까 걱정만 했다. 눈에 관련된 시 한줄 읽을 생각은 왜 못 했을까. 이렇게 정신이 가난한 줄 몰랐다. 눈 밑에 심술보 주머니가 커지고 입가에 팔자 주름 생기는 것만 슬퍼했다. 감정은 늙어 이미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 시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약국에 오는 또래에게 나와 같은 기분을 느껴보라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두 장을 손 글씨로 예쁘게 썼다. 아침나절이 지나갔다. 시 이야기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흔들거렸다.

K가 손수레에 큰 비닐봉투를 싣고 왔다. 그녀는 척추에 금이 가서 보조기구를 차고 다닌다. 무거운 것을 가지고 다닐 계제가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석 달 동안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은 상태다.

무겁게 왜 이런 것을 끌고 다녀요. 허리는 어떻게 하려고?’ 풀어보니 석화다. 여수에 사는 조카가 보내왔단다. 싱싱할 때 주고 싶어서 받자마자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얼마나 보냈기에 우리 집에 이렇게 많이 가져왔을까. 그녀 조카의 눈도 코도 모르는데 얻어먹어도 될지 모르겠다.

그녀가 허리 때문에 요리를 못하니까 지난달에도 조카가 무를 나박나박 썰어 넣은 굴 무침과 갓김치와 파래무침 등을 보내왔다고 주었다. 입맛 없어 못 먹겠다며 삼단 찬합으로 가득가득 담아 왔다.

쪄 먹는 굴을 좋아한다. 부드럽고 따듯하고 그 자체로 간이 맞고 향도 좋고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본연의 맛을 즐긴다. 집에서는 껍데기가 덤턱스러워 사먹을 엄두를 못 냈다. 가까운 대천이라도 가야하는데 올해는 여행도 못하니 단념하고 있었다.

어느 해 지인이 고향인 고흥의 굴 밭에서 캐 왔다고 초대했었다. 생 굴회, 굴전, 굴 무침은 물론 찜 솥 가득 쪄서 그야말로 물릴 때까지 먹었다. 풍성하다, 사람입이 무섭다, 많다, 대박이다 등의 단어를 생각할 때 그 날 쌓인 굴이 떠오른다. 오늘 그 날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12월 그녀가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 했다 나왔다고 로봇 같은 걸음으로 약국에 왔다. 얼굴이 반쪽이었다. 우리가 벌써 겨울에 넘어질 나이인가. 동 연배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도 눈이 온 날이나 얼음이 얼었을 것 같은 날은 새벽 운동도 나가지 않고 조심조심하고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5~6년 전이다. 내가 자기 나이쯤 되어 보여 살 약도 없는데 그냥 들어왔다고 했다. 어느 여고를 몇 년에 졸업했다고 소개를 했다. 학교는 달라도 졸업연도가 같아 반가웠다. 그 학교와 우리 학교는 약간 라이벌의식이 있었다.

같은 시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끼리는 역사나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단어 하나로도 소통할 수 있어 좋다. 소월이나 윤동주, 영랑은 잘 알지만 백석은 학교 다닐 때 배우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불자다. 절에 가면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보다 공양간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그녀다. 길상사 얘기부터 꺼냈다. 뉴스를 통해서 대원각 주인 김영한도 안다. 법정 스님께 수많은 재산을 다 드리고 요정을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길 청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김영한의 불심을 감탄하며 언제 한 번 길상사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녀에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어 주었다. 나타샤가 길상화보살 김영한이라고 알려주었다. 백석이 함흥 영생여고 영어선생이었는데 동료교사의 전별장소인 요정에서 당시 22세인 김영한과 눈빛이 마주쳤다.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이백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도 지어주었다. 백석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둘은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길상화보살이 전 재산을 법정스님께 시주할 때,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천 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는 대답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기억도 새롭다. 자야는 매년 71일 백석의 생일날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금식을 했다고 한다. 절절한 사랑과 존경과 그리움에 내 가슴까지 먹먹하다.

K와 난 여고생이라도 된 듯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눈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읽었다.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그녀에게 시 한 장을 주었다.

퇴근 후 굴 한 망태기를 곰탕 솥에 쪘다. 크고 싱싱한 알맹이를 입에 넣었는데 미각세포들이 난리가 났다. 남편은 소주 한 잔을 비운다. 내 입은 머릿속은 이야 이야 춤을 춘다.

정신이 가난하네 어쩌네, 한 것은 순간이었나 보다.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이리 무너지다니. 책을 읽으며 이리 행복한 적이 언제였던가. 이러니 동네 사람들이 시()는 주지 않고 먹을 것만 갖다 주지.

2021.1.30


댓글목록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설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되길 바랍니다.
며느리와 손자 손녀는 오지 않고 아들만 왔다 갔어요.
딸도 애들이 다섯이나 되니 다 올 수 없어 사위와 둘이만 왔어요.
가족끼리 머리맛대고 웃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연휴동안 포도밭에서 가지치기만 했습니다.
곧 봄이 오겠지요. 감사합니다.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글의 마지막 문장에 살아 숨쉬는 윤선생님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 요동치는 부자이시네요. 원래 사람의 본성이이란 원초적 본능은 무엇보다 앞서기 때문네 탓할 바가 아니지 싶습니다. 이제 설이 지났으니 미구에 봄이 오겠지요. 오늘 등산을 했는데 바람결에 성급한  봄 기운이 가득 실려 있더군요. 남녘인 때문일지 모르지만.....

"정신이 가난하네 어쩌네, 한 것은 순간이었나 보다.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이리 무너지다니. 책을 읽으며 이리 행복한 적이 언제였던가. 이러니 동네 사람들이 시(詩)는 주지 않고 먹을 것만 갖다 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