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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천년 고찰 정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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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4건 조회 1,306회 작성일 20-03-1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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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정취암

 

즈믄() 해를 훌쩍 넘긴 도량 정취암(淨趣庵)*과 가슴 떨리는 해후였다. 유장한 세월 동안 켜켜이 아로새겨졌을 혼과 불법의 진리를 통해 옛 얼의 맥을 어렴풋하게라도 어림해보리라는 요량에서 나선 나들이였다.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에 창건된 사찰임에도 명칭에 ()’이 붙어있다. 여기서 웅장한 외양을 뽐내는 대가람과 격이 다른 도량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게다. 속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예단했는데 도처에 고고한 불법의 기운이 승해 자꾸 자세를 가다듬으며 멈칫거렸다. 원래 세속의 풍진에 찌든 대중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깊숙한 산속 아스라한 기암절벽 위에 터를 틀었다. 그런데 현대문명의 거센 파고를 비켜 갈 재간이 없었던가. 오늘날 이웃집에 마을* 가듯이 험지의 암자를 승용차로 찾아오는 현실을 이르는 독백이다.

 

대성산 정상 언저리 가파른 절벽에 매달리듯 터 잡은 정취암의 원통보전 앞뜰에서 내려다보니 들녘과 띄엄띄엄한 농가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옛날 같으면 저 아랫동네 속가에서 출발해도 가파른 산비탈을 끙끙거리며 타고 오르다가 수직 절벽 위의 암자에 다다르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게다. 그런 때문에 찾는 불자나 탐방객의 발길이 뜸해 늘 한적하고 고요가 깃든 관계로 스님들이 묵언 수행하기에 최적지였으리라. 한편 초행길에 택했던 찻길은 암자의 반대쪽에서 진입하여 산청둔철천문대를 지나 산꼭대기 능선을 넘어 암자에 다가가는 노정이었다. 그 길은 롤러코스트 처럼 오르내림이 심한가하면 아찔한 지그재그 형으로 굴곡이 예사롭지 않고 낯설어 이따금 섬뜩하기도 했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686)한 사찰이다. 당시 단성현(丹城縣) 북방 40리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 기암절벽 난간의 비좁은 터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 산수와 풍광이 금강에 버금간다하여 소금강(小金剛)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사찰을 창건하게 된 유래이다. 어느 날 동해에서 장육금신(丈六金身 :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두 줄기 영롱한 서광을 비췄다. 그중 한 줄기는 금강산을, 다른 하나는 대성산을 비췄다. 의상대사가 이 빛 줄기를 쫓아가 금강산에 원통암(圓通庵), 대성산에 정취사(淨趣寺)를 세웠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까지의 기록에는 정취사(淨趣寺)로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후기에서 구한말에는 정취암(淨趣庵)으로 바뀐 것이 여태까지 그대로 불린단다. 한편 고려 공민왕 시절(1351) 중수 되었고, 조선 효종 시절(1652) 소실되었다가 중건되면서 관음상을 조성했다. 또한 최근에 세 차례(1987, 1995년과 1996)에 걸쳐 크고 작은 불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는 귀띔이다.

 

정취암은 정취보살(淨趣菩薩)을 모신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이다. 여기서 정취보살은 극락이나 해탈의 길에 빨리 이를 방법을 일깨워주는 보살이란다. 이 보살은 하나의 목표를 정하면 오직 그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함으로써 무이행(無異行)을 실천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암자는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사찰로도 유명하다는 전언이다. 불교문화권의 다른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관음성지로 널리 알려진 도량으로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이 유명하다. 이 불상은 연꽃무늬 장식의 대좌(臺座)에 착석한 관음보살좌상으로 불신(佛身)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좌대가 하나의 목재로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대충 50cm 정도의 불상으로 등에서부터 약간 앞으로 굽은 자세 때문인지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있다. 이 원통보전의 외부 벽면에는 부처님 일생을 함축한 8상성도(八相成道)가 그려져 있다. 아울러 삼성각(三聖閣)에 모셔졌던 산신탱화(山神幀畫)가 널리 알려졌는데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이 탱화는 산신을 그린 그림이다. 보통 탱화는 산신이 호랑이 옆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 탱화에서는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어디론가 행차하는 모습이고, 그 양옆에는 그를 따르는 동자를 표현해 놓았단다. 그런데 최근(1996) 삼성각을 중수하고 산신탱화를 새로 조성해 봉안하고, 원본은 도난방지를 위해 본사인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다.

 

삼성각 옆쪽에 쌍거북바위(영귀암 : 靈龜岩)가 있다. 자고로 거북이는 장수, 벽사(辟邪), 상서로움의 대상으로 여겨 영물로 믿어왔다. 이런 맥락인지 쌍거북바위에 비손하면 부부 금슬이 좋아지고, 귀한 자손을 얻게 되며, 사업이 번창하는 등 소원을 이루는 영험이 있다고 알려졌다는 얘기이다.

 

어린 시절 사찰에서 가장 두려운 곳이 해우소(解憂所)였다. 왜냐하면 고찰일수록 인적이 뜸한 외진 절벽이나 낭떠러지 끝에 해우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시렁처럼 걸쳐놓은 두꺼운 판자를 밟고 배설했던 환경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예로부터 처가와 변소는 멀수록 좋다고 했다.’ 이는 현대화된 수세식 화장실이 아닌 재래의 푸세식화장실 문화에 기인했던 풍조였으리라. 이 암자의 해우소가 영락없이 그리 각인되었다. 경건하고 청정한 도량에서 악취가 진동하는 골칫거리 혐오시설을 한갓지게 외 돌아진 천애의 절벽 끝에 앉혔던 뜻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을법하다. 낯선 대중이나 탐방객에게 해우소가 위험타고 느꼈는지 추락위험이라는 안내문을 붙여둔 배려가 그나마 따뜻하게 다가왔다.

 

원통보전 뒤쪽 완만한 오르막을 몇 걸음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삼성각, 왼쪽으로 정취전(正趣殿)과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응진전을 지나 왼쪽 오르막으로 좁다란 데크로드(deck road)를 따라 가파른 비탈을 헉헉대며 오르면 정취전과 삼성각 뒤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언저리에 불규칙한 계단 같은 암반지대를 마주한다. 여기가 세심대(洗心臺)이다. 그 돌계단의 편안한 자리에 걸터앉아 마냥 한가로운 들녘과 점점이 박혀있는 민가와 저 멀리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을 조감(鳥瞰)하다 보면 허접한 번뇌나 망상을 끊고 정갈한 영혼에 이르고도 남지 싶었다. 얼마나 몽환적인 정경이 펼쳐지면 세심대 한쪽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고 일출 행사를 펼치거나 일몰을 조망하는 걸까. 이처럼 걸출한 선경의 영지에서 일구월심 불도를 닦으며 용맹정진하면 저절로 득도를 하고 깨우쳐 해탈에 이르지 싶었다.

 

산과 물 그리고 사람이 모두 맑고 깨끗한 삼청(三淸)의 고을이 산청(山淸)이란다. 이런 명승지의 고향 산청의 9(九景) 중에 하나인 정취암 옆 우뚝한 암반 절벽의 아찔한 벼랑에 발을 딛고 눈 아래 아스라한 산하를 무심의 경지에 빠진 채 조망했다. 겹겹으로 둘러 싼 산과 골자기에 낮게 내려앉은 흰 구름이 무척 정겨웠다. 그런데 누렇게 물든 들판에 적막과 고요가 짙게 드리워진 정경이 내 맘을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요와 불심이 가득 응축된 도량은 속세와 견줄 수 없는 선계였다. 잠시라도 현실의 굴레를 잊고 심신이 자유롭고 정갈한 영혼을 위해 무아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천년 고찰과 만남은 외로움을 떨칠 요량에서 나선 이 가을의 나들이 중에 압권이며 백미였다. 이런 강한 울림 때문일까. 암자 입구의 종무소 벽에 내건 마음을 맑게 / 세상을 향기롭게라는 표어(標語)가 맘속 깊이 파고 들어 똬리를 틀었다.

 

=====

* 정취암 : 경남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 - 87

* 마을 :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

 

시와 늪, 2020년 신년호, 통권46, 2020130

(20191020일 늦은 밤)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산과 물 그리고 사람이 모두 맑고 깨끗한 삼청(三淸)의 고을이 산청(山淸)이란다. 이런 명승지의 고향 산청의 9경(九景) 중에 하나인 정취암 옆 우뚝한 암반 절벽의 아찔한 벼랑에 발을 딛고 눈 아래 아스라한 산하를 무심의 경지에 빠진 채 조망했다. 겹겹으로 둘러 싼 산과 골자기에 낮게 내려앉은 흰 구름이 무척 정겨웠다. 그런데 누렇게 물든 들판에 적막과 고요가 짙게 드리워진 정경이 내 맘을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요와 불심이 가득 응축된 도량은 속세와 견줄 수 없는 선계였다. 잠시라도 현실의 굴레를 잊고 심신이 자유롭고 정갈한 영혼을 위해 무아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천년 고찰과 만남은 외로움을 떨칠 요량에서 나선 이 가을의 나들이 중에 압권이며 백미였다. 이런 강한 울림 때문일까. 암자 입구의 종무소 벽에 내건 “마음을 맑게 / 세상을 향기롭게”라는 표어(標語)가 맘속 깊이 파고 들어 똬리를 틀었다.

교수님, 경호강이 산청에 있지요?

여기 주변은 코로나로 뒤숭숭하지만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합니다.

이분남님의 댓글

이분남 작성일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일러주시는 교수님과 함께 정취암 한바퀴 잘 돌아보고 갑니다.
늘 글을 놓지않으시고 건필하시는 모습 존경스럽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건강관리 잘 하시길 빕니다 ^^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지금 정취암은 쉽게 갈 수 있는 절입니다. 몇 해 전에는 정취암 오를려면 땀 깨나 뺐어요.^^
저도 가끔 들리는 절입니다.^^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천년고찰 정취암에 심취하여 한동안 정취암의 승경이
오래도록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늘 건안 건필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