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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귤화위지(橘化爲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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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1,115회 작성일 21-04-0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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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화위지*


‘찹쌀모찌(餠 : もち)’라고 불리던 찹쌀떡과 ‘미깡(蜜柑 : みかん)’이라고 호칭되던 밀감에 얽힌 회상이다. 어린 시절 기껏해야 몇 차례 한두 개 얻어먹으며 느꼈던 묘한 맛은 기가 막힐 지경으로 황홀했다. 하지만 동족상잔의 불행한 6.25 전쟁과 휴전이라는 혼란을 겪으며 어둡고 배고픈 보릿고개(麥嶺期)를 힘겹게 넘겨야 했던 질곡의 세월에 고상한 맛을 맘껏 즐기고픈 호사는 언감생심이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나 다름없이 심각한 전화(戰禍)를 입었던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이 불가피했던 절박한 혼란기였다. 때문에 요즘은 아이들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과와 배도 명절이나 조상 제사를 모시는 날 겨우 한 조각 맛 볼 정도로 궁핍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 과일가게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밀감을 처음 먹어본 게 중학교 시절로 회억 된다.


누군가가 할아버지께 문안 오는 길에 사왔던 찹쌀떡을 처음 입에 대본 게 초등학교 때였지 싶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전란을 피하기 위해 피난과 귀향을 되풀이 했다. 그러다가 휴전 될 무렵부터 8년 동안이나 초등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우여곡절을 겪었을 뿐 아니라 삼시세끼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이라서 환상적이던 찹쌀떡을 먹어볼 기회가 드물었다. 결국 먹거리가 매우 귀해서 실제 이상의 각별한 맛으로 각인 됐었을 게다. 이런 연유였으리라. 어린 마음에 먼 훗날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 찹쌀떡을 방에 가득히 사다가 쟁여놓고 실컷 먹으리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님 슬하를 떠나 먼 일가 할아버지인 족대부(族大父) 댁에서 3년 내내 기거했다. 후덕했던 족대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주머니)이 외기러기 처지가 되어 친정살이를 했다. 외롭고 따분했던지 툭하면 바로 옆방에서 같은 연배들과 어울려 화투판이 벌어졌다. 당시 겨울이면 떠돌이 행상이 골목을 누비면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팔러 다니던 영향이었던가. 특히 겨울이면 ‘찹쌀떡과 메밀묵’ 내기를 많이 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짜증이 나다가도 어이없게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침을 꼴깍꼴깍 넘기곤 했다. 하지만 나를 유령 취급하듯이 철저히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만 먹던 야박한 처사가 철없던 어린 마음에 엄청 서운함을 넘어 얄밉기까지 했다.


‘미깡’이라는 귤을 처음 먹어본 게 중학교 1학년 입학 직후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옆자리의 짝꿍 K가 책상 서랍 안으로 촉감이 부드러운 과일 두 개를 슬며시 쥐어줬다. 자기 작은아버지가 일본에 출장 갔다가 할아버지 생일 선물로 사온 ‘미깡’이라고 말하면서. 어찌 되었던 입에서 살살 녹던 감귤의 감미로운 감촉과 오묘한 맛은 아직껏 또렷하다. 지난 50년대 말인 때문에 보통 사람이 여권 발급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지났을 무렵(1968년)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내 자신이 정부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파월장병 위문단‘ 일원으로 베트남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도 일반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겨우 여행증명서 발급이 고작이었다.


너나없이 지독하게 궁핍했던 서러운 시절로부터 어언 60년  남짓 세월이 흐른 지금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물질적인 넉넉함을 맘껏 누리고 있다. 선진국으로부터 구호물자, 강냉이 가루, 분유 등을 원조 받았음에도 초근목피로 모진 목숨을 연명했던 비참한 세월에 비하면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오늘이다. 갑자기 누리는 풍요의 독(毒)일까. 지난 세월 찾아보기 어렵던 현상이다. 그 옛날엔 주위에 비대한 과체중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요즈음 체중 감량이 필요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기름진 음식물을 지나치게 섭취하거나 정크 푸드(junk food)나 패스트푸드(fast food)가 물밀 듯이 밀려온 해악이리라. 한편 지난 세월 과일이 귀해서 칙사(勅使) 대접을 받았다. 한데 오늘날은 수많은 과일과 주전부리가 흘러넘쳐나서 되레 탈이다. 주된 먹거리만으로도 족한데 이들까지 무절제하게 과다 섭취하면서 영양 과잉이라는 부작용은 없는지 꼼꼼하게 짚어가며 따져봐야 아귀가 맞지 싶다.


이따금 제과점의 맛깔스럽고 먹음직한 찹쌀떡이나 이런저런 과일을 먹어봐도 예전과 달리 별로 감흥이 없다. 오늘 아침에도 외사촌 동생을 비롯해 멀리 익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약사인 문우 S님이 보내온 귤 박스에서 몇 알씩 꺼내서 먹어봤다. 어렸을 적의 첫 대면에서 전해지던 떨림과 신비했던 오묘한 맛에 비해 너무도 거리가 멀어 절레절레 도리질을 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강렬했던 첫 경험으로부터 반세기 넘게 세월이 흐르면서 형편이 좋아짐에 따라 시나브로 입맛이나 판단 기준이 판이하게 변한 때문일 게다. 이런 경우를 족집게 과외 하듯이 콕 집어 깨우쳐주려고 “귤화위지” 라는 말을 만들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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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화위지(橘化爲枳) : 중국에서 생겨난 말로 ‘회남(淮南)의 귤을 회북(淮北)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성질이 변하게 마련임을 이르기도 한다.


한국수필, 2021년 4월호(통권 314호), 2021년 4월 1일
(2021년 1월 23일 토요일)

댓글목록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찹쌀떡과 밀감에 대한 지난날 어려웠던
추억을 회상해서 쓰신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귤화위지" 라는 어원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건안건필을 기원 드립니다. 김재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