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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라쇼몽을 읽으며 반추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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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래여 댓글 2건 조회 1,117회 작성일 21-04-18 17:11

본문

라쇼몽을 읽으며 반추하는 삶

        박래녀

 

  일본 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을 다시 읽는다. 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라 기억조차 못하다가 우연히 딸의 서재에서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35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단편집은 여전히 세계어로 번역되어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짧은 단편들은 심리묘사에 뛰어나다.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심리 묘사나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을 그린 것도 있고 기묘한 이야기도 있다. 단편들은 시종일관 잔잔하다. 친한 친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식이다. 한 작품을 읽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나이 탓일까. 젊어서 하던 독서와 이순 중반에 하는 독서의 의미는 다르다. 젊어서는 어떤 책을 읽었다는 것에 치중하고, 줄거리가 무엇이었다는 것에 치중한 책읽기였다면 지금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된다. 사람의 심리에 대해 생각하고 수긍하게 된다. 왜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작가의 심리까지 파악하려 들 때도 있다. 작가의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을 때 감정이입이 된다. 나도 소설을 쓰는 작가기 때문일까. 내가 쓰고자하는 소설은 어떤 것인지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서조차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다. 때로는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만 함몰되어 살고있지 않나 싶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가정사가 도마에 오르기 십상이다. 여자들 수다는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주로 가십거리나 남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나는 노인에 대해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식상하다. 새로운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노인에게 얽매어 있는 나를 안쓰러워하거나 위로하는 것도 잠깐이다. 새로울 것 없는 남의 가정 사에 식상하면 새로운 남의 가정 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여자들 아닐까. 여자들은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지만 수다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 노인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자마자 칠십 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톡 쏘아 준다.

 “너하고 너의 시아버지하고 악연이다. 푸닥거리를 하든지 해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타인이다. 내 삶은 그들에게 가십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그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늙은 시부모 모시기를 귀찮아하는 못 된 며느리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들이 며느리일 때도 나처럼 시부모 모시기를 힘들어했을 것이다. 막상 그들이 시어머니가 되어 며느리를 거느렸으니 시부모 모시기 힘들다고 푸념하는 내가 못 마땅한 것이다. ‘시부모 잘 모시면 자식들이 복 받는다. 잘 모셔라.’ 그 말에는 그들도 며느리로부터 모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들도 자식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오래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심리가 내면에 깔려 있지 않을까.

 

  소설 <라쇼몽>속에 수록된 단편들은 그런 인간의 미묘한 내면을 그렸다. 그것을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라쇼몽>에서 주인에게 쫓겨난 하인이 늙은 노파의 옷을 벗겨 도망치는 마음이나 지독히 사랑한 자기 딸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며 걸작을 남기고 자살하는 <지옥변풍경>이나 길어진 코에 열등의식이 강했던 스님이 다시 길어진 코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나 한 남자를 놓고 자매간의 시샘을 그린 <가을>같은 작품들처럼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고 기묘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내가 두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인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늙고 병들어가는 노인의 생에 대한 집착과 연민이고 나 역시 노인처럼 오래 살면 다를 바 없다는 뜻의 다른 표현임을 그들이 어찌 알겠나.

 내 감정을 말 할 수 있을 때의 나는 행복한 존재다. 자신의 감정조차 말할 수 없는 자의 마음은 어떨까. 침묵하는 것에 길들면 그 자체가 행복이 될까. 불행이 될까. 체념이 될까. 광인이 된 무명화가의 유작 <늪지>앞에서 걸작이라 외치는 한 사람의 독자로 인해 무명화가의 영혼은 위로 받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오직 그것을 느끼는 사람만의 것이다. 내 심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면 오죽 좋으랴.

 점심시간이다. 등 너머 강 처사 부부가 점심을 사겠단다. 며칠 전 강 처사 집의 화목 보일러가 고장 나서 농부가 갔었다. 작은 부품 몇 개로 말짱하게 고쳐준 모양이다. 출장비 대신 밥 산단다. 농부는 시댁에 들려 노인들 점심 차려드리고 올 것이다. 주말에 내가 노인들 끼니를 챙기면 농부는 편할 텐데. 밥 차리기 싫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나는 일하러 간 농부에게 내가 다녀올게그 말을 하기 싫어 당신이 차려드리고 오소.’ 한다. 나도 참 이기적이다. 농부 입장에서 아내에게 불만이 아니 생기겠는가. ‘집에서 놀면서 노인들 밥이나 좀 차려주고 오지. 그것도 싫어하는 당신 뭐 하는 여자야?’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가끔 선심 쓰듯 노인들 밥은 내가 차릴게. 당신은 당신 볼일 보고 오소.’할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전적으로 내가 맡아서 하지 않는 이유는 농부가 내게 준 마음의 상처 때문이 아닐까. 재가 요양보호사도 없을 때 나는 두 집 부엌살림에 지치고 두 노인의 시소게임에 지쳐갔지만 농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건성이었다. ‘여태 당신이 모셨으니 끝까지 당신이 모셔야지.’ 그런 말을 쉽게 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다. 치매환자인 시모께서 뇌경색으로 수술을 하고 집으로 모셨을 때 농부는 당신이 두 노인 모시겠다고 했었다. ‘당신이 한다고 했잖아. 한 입에 두말하면 안 되지. 해 보소.’하는 묵은 감정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노인 때문에 농부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사고가 비슷한 것은 아닐까. 모두 이기적이다. 자기 편할 도리만 찾고 자기를 위해주기만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노인이 될수록 그렇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인이 오래 살면 자식이 먼저 죽는다는 말을 듣는다. 자식 한 명 앞세우지 않은 아흔 다섯의 노인은 천복을 타고 난 것일 게다. 돈에 쪼들리지 않는 것도 복이다. 옆에 사는 자식이 들며나며 보살피는 것도 복이다. 다만 그 자식이나 며느리가 노인이 되어 자꾸 지친다는 거다.

 나는 다시 소설 <라쇼몽>속으로 빠진다. 이승에서 단편 미생의 믿음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남자가 존재하기나 할까. 약속한 장소에서 여자를 기다리다 주검이 되는 남자를 어리석다 할 수 있을까. ‘버려진 아이를 읽으며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저승 어디 계시기나 한 것인지. 엄마가 환자가 되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 엄마였기에 짜증도 맘대로 냈었다. ‘왜 나만 자식이냐고. 주야장창 나만 찾느냐고. 시부모님 모시는 것도 힘에 부쳐 죽을 판인데 엄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지금 생각하면 내게 주어진 업이고 내 사주팔자라는 생각도 든다.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라쇼몽>을 쓴 작가의 마음을 되새김질 하며 해거름을 맞이한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삶과 늙어감, 자식과 며느리, 부양의 의무와 인간의 도리 사이의 괴리 등의 화두를 곱씹어 봤습니다. 그리고 글 가운데

 "나이 탓일까. 젊어서 하던 독서와 이순 중반에 하는 독서의 의미는 다르다."는 구절에 생각이 자꾸 머물렀습니다.

생각의 깊이나 폭을 비롯해 세상을 보는 눈에 달라진 때문이 아닐가 라는 생각에 잠기면서.....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희수(喜壽)에 이르니 별 게 다 서럽고 안타깝더이다.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선생님, 마음 알 것 같아요. 벌써부터 저도 그런 걸요. 노파심에 허덕거리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 하는 못 마땅한 행동을 지적하려고도 하고요.
외로움도 더 많이 타는 것 같고요. ㅋ 그런데도 몸은 더 힘들어지고요. 자꾸 서글프지기도 하고요. ㅋ 선생님, 어쨌든 긍정적으로 밝고 환하게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