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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흔넷에 책을 펴내시는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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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968회 작성일 21-05-1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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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넷에 책을 펴내시는 열정


 그 옛날 중국에서 여든인 산수(傘壽)와 아흔인 졸수(卒壽)를 모(耄 : 八十九十曰耄)라 하고, 7세를 도(悼 : 七年曰悼)라고 했다. 그런데 “도(悼)와 모(耄)는 죄를 지어도 형(刑)을 받지 않는다(悼與耄 雖有罪 不加刑焉)”고 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와 오랜 세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달관에 이른 노인들은 중죄를 지을 리 없을 뿐 아니라 설혹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지라도 가벼울 개연성에서 너그러운 관용으로 포용하려는 사회적 합의를 넌지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들 오늘날을 백세시대라고 말해도 졸수를 넘기고도 젊은이를 능가할 정도로 활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다. 이런 현실에서 아흔넷에 흐릿흐릿해진 지난 흔적을 추억의 곳간에서 불러내 정리하여 책을 집필하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무진생(戊辰生 : 1928)으로 기축년(己丑年 : 1949)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지난 계유년(癸酉年 : 1993)에 정년퇴임(교장)하기 까지 44년간 교직에 봉직해온 큰 어른이며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개신교 신자(장로)로서 하느님을 섬기며 봉사해온 종교인이기도 하다. 연세가 들면 건강 문제로 바깥나들이도 자유롭지 못한 게 보통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든 여덟인 미수(米壽)를 지나서 ‘시창작반 교실’에 적을 두고 파고들어 지난해(2020)에는 문학지 신인상에 공모하여 당선됨으로써 시인으로 등단한 어엿한 문인이다. 아마도 생소한 시(詩)에 대해 입문하여 정진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생을 아우르는 문집 하나 펴낼 꿈을 어렴풋이 꿔 오셨지 싶다.


백세(百歲)인 상수(上壽) 혹은 기이(期頤)를 몇 해 앞두었기에 여느 노인이라면 기껏해야 당신의 건강을 챙기며 조심조심 나서는 바깥나들이가 고작이었으리라. 하지만 무한한 축복을 받았는지 청장년 같은 정신력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아스라한 옛 기억을 되살려 거침없이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 추진력을 한껏 과시하는 자신감이 마냥 부럽고 신기할 뿐이다. 이제 겨우 일흔 일곱인 희수(喜壽)에 이른 처지인데도 지난 기억이 희미해서 끌탕을 치며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해 허둥대기 일쑤인 내게 비하면 믿어지지 않는 건강이다. 과연 나도 저 연세까지 건강하고 거리낌 없이 활동할 수 있으며 집필도 지금처럼 지속할 수 있을까.


해방둥이(乙酉生)인 내가 다섯 살 때(1949) 초등학교 교원으로 첫발을 내디디셨다. 한데, 당신이 등단하기 한두 해 전의 일이다. 어쩌다가 당신 앞에서 수필에 대한 짧은 강의를 했다. 그 뒤 유수의 문학지를 통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렇게 끊어질 듯 했던 연의 끈이 책 출판과정에서 다시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우연찮게 원고 교정에서 아주 쬐끔 힘을 보태는 영광 뿐 아니라 책의 뒤표지에 들어갈 표사(表辭)*도 써 달라고 청탁해 왔다.


여태까지 글을 쓰면서 대폭적으로 개정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무척 어렵고 까다로워 두 손 번쩍 들고 백기 투항했던 적이 숱했다. 선생님에 비하면 청춘격인  나도 그 지경인데 하물며 일제 강점기와 건국 초기에 교육을 받았던 당신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었지 싶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허점투성이일터이지만 정성을 다해 원고 교정에 힘을 보탰다. 그 옛날 교육의 영향일까. 내 대학 시절의 교재 얘기다. 거의 모든 책에 나오는 단어는 한자(漢字)로 표기하여 지금 들춰보면 마치 한자 책 같다. 오늘날 그런 책을 한글세대들에게 읽으라고 들여 미는 즉시 곧바로 퇴자를 놓으리라. 그럼에도 한자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여태까지도 한자를 습관적으로 많이 혼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선생님 원고에도 옛날 책처럼 한자가 즐비하게 깔려있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솎아냈다. 무척 서운해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칼질을 하지 않으면 철저히 배척당할 수밖에 없어 비상 처방을 했다.


책의 뒤표지에 들어갈 표사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적었다. “상수(上壽)를 앞에 둔 아흔넷이라는 연세에 지난 세월의 흔적을 소환해 책으로 펴내시려는 열정을 지켜보며 존경을 넘어 경외(敬畏)로워 어리둥절했다. 일생 동안 교직(교장)에 봉직하시는 한편 독실한 기독교 신자(장로)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망백(望百)의 언저리에서 늦깎이로 시인에 등단한 큰 어른으로 모두의 사표(師表)이며 길라잡이시다. 이런 당신의 일대기를 응축해 빚어낸 책을 통해 또 다른 가르침과 길을 일깨워 주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왕성한 노익장을 과시하는 성품을 흠모하며 무조건 닮고 싶다는 욕심을 잠재울 수 없다. 아울러 감히 말씀 올린다. ‘오래오래 강녕(康寧)하셔서 미욱한 우리들을 바르게 이끌어 주십사!’ 라고.”


주위의 어른 중에 가장 오래 사셨던 분이 장모님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반 년 가까이 병상을 지키다가 아흔 여섯이던 임진년(壬辰年 : 2012) 봄 벚꽃이 흩날리던 날 세상을 뜨셨다. 장모님도 이승을 하직하실 때까지 강단 있고 총기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생님과 닮은꼴이었다. 내 장모님이나 선생님처럼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며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고 묵묵히 내 생을 누리다가 미련 없이 이승과 작별하면 좋겠다. 이런 맥락에서 아흔넷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 적바림된 ‘책 출간’에 진력하시는 당신은 결국 나의 사표이다. 앞으로 열일곱 해 뒤인 아흔넷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나의 버킷 리스트에 어떤 바람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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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表辭) : 매체 표지에 실려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글. 본문을 읽기 전 작품의 요점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며 안내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는가 하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매출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버킷 리스트(bucket list) :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을 이른다. ‘죽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속어인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으로부터 만들어졌다. 


2021년 5월 2일 일요일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글을 읽으니 부끄럽습니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기같은 나이인 저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건강하게 꿈을 이루며 사는 삶이야말로 축복이지 싶습니다.
교수님도 건강하고 남이 있는 꿈도 이루시는 축복의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영숙 올림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아흔넷에 책을 펴내시는" 글에 심취되어
푹 쉬어 갑니다.
 
감명 깊은  글 올려 주시어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김재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