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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닌 밤중에 벌목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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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1,102회 작성일 21-10-2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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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밤중에 벌목꾼


오늘 꼭두새벽부터 팔자에도 없는 벌목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며칠 전 깜깜한 새벽에 손전등을 밝히고 터덜터덜 산에 오르다가 정상 언저리에서였다. 지난 밤(2021년 8월 23일) 늦은 시각에 상륙한 태풍 오마이스(omais) 때문에 멀쩡한 참나무 두 그루가 부러져 있었다. 그중에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은 한 그루는 등산길을 덮쳐 통행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우람한 덩치의 다른 그루는 키 작은 몇몇 관목(灌木) 위에 얹혀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려 대롱거렸다. 도저히 피해 지나칠 수 없어 대충 잔가지를 손으로 꺾어 겨우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틔웠었다. 그런데 어제(28일) 새벽에 등산길에 보니 그동안 공중에 매달렸던 우람한 한 그루마저도 땅으로 떨어져 길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또 다시 대충 잔가지를 꺾어내고 아쉬운 대로 통행할 수 있도록 임시 조치를 했다. 하지만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오가는 이들이 크게 다칠 위험이 커보였다. 그래서 톱을 가지고 가서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기로 했다.


4시 정각에 집을 나섰다. 기상하여 인터넷에 날씨를 살펴보니 우리 동네엔 새벽 6시에 비가 내리는 것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서둘러 접는 톱과 우산을 챙겨서 배낭에 넣었다. 본격적인 등산로 초입의 육각정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해마다 두세 차례 새벽 등산에 동행한 적이 있는 백발인 할머니가 도착했다. 성도 이름도 모를지라도 이순의 후반으로 알고 있다. 간간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태풍으로 쓰러진 참나무에 대한 전후 사정과 제거 계획을 얘기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던 참나무 앞에 이르렀을 때 당장 제거하자고 했다. 아직도 깜깜해 주위의 사물 분별이 되지 않는 시각이라서 할머니는 자기 손전등과 내 손전등 등 두 개를 비춰주고 나는 톱으로 크고 작은 가지를 차근차근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는 아닌 밤중에 벌목꾼을 자청한 꼴이었다.


간단한 작업으로 여기고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몇 십 년 자란 참나무 두 그루가 태풍에 부러져 통째로 길을 뒤덮었기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톱질하고 할머니는 손전등을 비춰주면서 잘라낸 가지를 치웠다. 톱으로 가지를 자르는 동안 톱날이 나무에 끼어 꼼짝도 하지 않아 애를 먹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무척 힘들었다, 나 혼자라면 중간에 주저앉아 쉬면서 기력이 회복되면 천천히 작업을 이어갔으리라. 제대로 된 통성명도 없었던 서먹서먹한 처지에 우습게 비춰질까 걱정 되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티며 견뎌냈다. 적어도 30분 가까이 기를 쓰면서 끙끙댄 끝에 얼추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작업을 끝냈을 무렵엔 손과 팔에 감각이 없었고 어지러울 뿐 아니라 속이 울렁거려 한 참을 쭈그리고 앉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 속내를 온새미로 들킬세라 구시렁거리며 배낭에 있던 우산을 꺼내는가 하면 톱을 접어서 비닐 봉투에 넣었다 꺼내기를 되풀이 했다. 기를 쓰며 부정해도 가는 세월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기력을 회복할 지음 앞서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려던 할머니가 수고 했다고 격려했다. 휘적휘적 4~5분 걸어 정상에 도착했다. 일요일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없었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운동을 하다 슬그머니 중간에 끝냈다. 그리곤 긴 벤치에 벌렁 누워 심호흡을 하며 아직도 미진한 컨디션을 조절했다.


하산 길에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는 잠이 오지 않아 택한 대응 방법이 새벽등산이라 했다. 말이 새벽등산이지 한 밤중의 등산이라는 표현이 합당할 성 싶다. 20여 년 넘게 새벽 3시쯤에 집을 나서 정상에 도착해 운동하고 집에 돌아가면 4시 30~40분경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날이 아니면 손전등도 켜지 않고 평소에 익혀둔 감각에 따라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등산로 주변에 무덤이 여기저기 널려있을 뿐 아니라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멧돼지가 무섭지 않느냐고. 무덤은 전혀 신경 씌이지 않으며 손전등을 켜지 않고 등산하면서 여러 번 멧돼지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었단다. 그들에 대한 공격 의사가 없음을 감지했는지 적당한 선에서 도망을 가더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두려움의 대상은 뜻밖에 사람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흉흉한 세상 때문일까. 야심한 시각에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낯선 등산객이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거나 가까이 다가오면 항상 적당히 따돌리고 안전한 곳에서 숨을 돌리며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한다는 고백에 왠지 씁쓸하고 아릿했다.


태풍으로 맥없이 쓰러져 완전히 길을 가로막았던 참나무를 제거했기에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다. 이런 것도 보시(布施)라고 한다면 다른 날보다 보람이 있었지 싶다. 요즘 청량산 정상과 직선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 ‘청량산 해양전망광장’을 짓겠다는 ‘의령군산림조합’의 플래카드가 설치되고 해당 터를 완전히 벌목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 청량산 소재지는 창원시인데 생뚱맞게 ‘의령군산림조합’ 관할이라는 사실이 의아하다. 또한 우뚝 직립(直立)한 원기둥의 외벽을 따라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조물인 전망대(청량산 해양전망광장) 바로 옆에 오래 전에 창원시에서 지은 육각정이 있다. 같은 장소에 엇비슷한 시설물을 중복해 건립한다는 데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 되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는 유관 단체끼리 실적을 쌓기 위한 낭비 행정의 표본이 아닐까. 이런 코미디(comedy) 같은 행정이 아니라 진정 주민을 위한다면 장마나 태풍 뒤에 동네의 등산로나 둘레 길을 꼼꼼히 살펴  문제가 발생한 부분을 즉시 보수해 준다면 좋을 터이다. 아울러 등산로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고사목(枯死木)이 도복된 경우나 멀쩡했던 나무가 쓰러져 통행이 불가능할 때 지체 없이 제거해 주는 생활 밀착형 행정을 촘촘하게 펼쳐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한맥문학, 2021년 10월호(통권 373호), 2021년 9월 25일
(2021년 8월 29일 일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큰일 하셨군요.
그냥 구청 산림과에 민원을 하시지 그랬어요? 온힘을 다해 여러 사람의 안전을 위해
솔선하시는 선생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평생 책상물림으로 사신 선생님께선 육체적인 노동이 무리가 아닐는지요?
저도 산에 오르면 고사목을 많이 보는데 고사목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고사목을 찾아 나무하러 다니셨기에 말입니다.
요즘은 산에 가보면 땔나무가 흔하디 흔하지만 그땐 모두 나무하러 다녔던 시절이니
고사목이 남아날 리가 없었지요.
선생님의보시로 많은 사람들이등산로를 편하게 이용하게 되었으니 선생님은 복 받으실겁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새벽 등산만으로도 힘드셨을 텐데 애쓰셨네요.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어쩔뻔 하셨어요?
 앞으로는 그런 일 있으면 절대 손 대지 마시고 구청이나 시청에 신고하셔요.
아무 일 없이 잘 마치셨으니 다행이고 또 다행입니다.

환절기에 건강관리 잘 하셔서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임영숙 올림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캄캄한 새벽 등산길에 태풍에 넘어진 참나무 두 그루
제거 작업에  애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으로서는 서툰
작업이고 평소 교수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시던 분이기에
앞으로는 절대 손수 하시는 일 없기 바랍니다. 제거 작업이
위험하니까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는 보시중의
최상의 보시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