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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나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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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775회 작성일 21-11-0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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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기행

윤복순

 

K가 나주를 일곱 번이나 갔다 왔다고 한다. 매력의 나주인 것 같은데 난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제일 추천해 주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뭐라 하는데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레스토랑이란다. 나는 양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또 어느 팥빙수 집을 소개한다.

언니, 나 나주 구경시켜 줘.’ 언니가 광주에 살고, 전남에서 교편을 잡아 여기저기 근무 안 해본 곳이 없으니 모두 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광주역에서 만났다. “처제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디냐?” “공부 하나도 안하고 왔어요.”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나왔다. 남도의 시 군을 다 구경했는데 나주만 빠졌다. 나주가 왜 광주에게 명성을 빼앗겼을까. 나주에 오니 마한의 도시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많이 쓰여 있다. 그 시대에는 모든 물류가 강을 따라 교류되었으니 영산강을 따라 나주가 번성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금성관이 전국의 객사중 제일 컸다고 하니 그 당시 나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주변은 나주곰탕 골목이다. 10시도 안 되었는데 어느 집은 벌써 줄을 섰다. 나주곰탕은 홍어삼합, 장어구이와 함께 나주의 3대 음식이다.

백호문학관에 가는 동안 K 이야기를 했다. 백호는 생각도 안 나고 임제라고 하니 고등학교 시절 고문시간에 배운 시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황진이를 애도하며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를 국어선생이었던 언니가 줄줄 외운다. 입구에 무어별과 흑마가 있다. 말은 임제가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여 아버지가 선물로 준 것이란 설명이다.

임제는 이 말을 타고 곳곳을 유람했으며 호방하고 예속에 구애되지 않았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뜨면서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 물곡사(勿哭辭).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도 못하는 나라에 살다가는 인생, 분하고 쪽팔릴지언정 뭐 슬퍼할 게 있다고 소리 내어 우느냐 울지 마라.

임제가 평안도 도사를 제수 받아 부임하던 길, 개성의 한 골짜기에서 마주친 황진이의 무덤 앞에 술을 올리고 시를 지었다. 시인으로 지식인으로 당대의 쟁쟁한 상남자들을 맞상대한 여인에 대한 존경이다. 나중에 양반의 신분으로 기생에게 잔을 올려 신분질서를 어지럽히고 예를 더럽혔다 하여 파직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문학관에서 가까운 복암리 고분으로 향했다. 들판에 왕릉처럼 큰 묘가 4개 있다. 왕족의 무덤인줄 알았다. 모를 땐 전시관으로 가서 공부하는 게 최고다. 안내자는 친절했고 익산에서 왔다고 하니 가볼만한 곳도 추천해 주고 방문기념 이라며 볼펜까지 챙겨준다.

나주평야 다시들은 일제 말부터 경작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 지금과 같은 네모반듯한 농경지로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7기의 고분 중 4기만 남았다. 그중 3호 분은 안동 권씨 선산으로 이용되고 있어 훼손이 되지 않았다.

복암리 3호 분에는 다양한 모양의 무덤방이 모여 있다. 고유무덤(재지계) 백제계무덤 왜(일본)계 무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각각의 무덤방에는 나주지역 물건 뿐 만아니라 백제계 대가야계 왜계 물건들이 주검과 함께 묻혀 있다. 그 당시에도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양세로 아파트형 고분이란 별명도 얻었다. 이와 같은 특색으로 지방문화재에서 국가사적 제404호로 승격되었다.

이곳에선 옹관(독널)을 사용했다. 옹기가 어찌나 작은지, 어떻게 시신을 넣었을까 의문이 많았다. 그 당시 사람들의 체구가 작았다고 해도 겨우 어린 아이나 들어갈 수 있는 정도다. 그 의문은 영상을 보면서 풀렸다. 시체를 반듯하게 뉜 게 아니라 아기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의 모습으로 옹관에 넣었다는 것이다. 편안하게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를 담아서. 3세기, 4세기, 5세기 시대를 거듭할수록 옹기의 크기도 커졌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큰 옹기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아파트형 고분과 옹관은 처음 보았다.

익산에도 입점리 고분전시관이 있다. 오래전에 가 보았는데 구덩식돌곽 무덤으로 봉분이 없었던 것 같다. 아는 것이 부족하니 비교해 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입점리에 가 봐야겠다.

오후엔 나주국립박물관에 갔다. 반남면에도 몇 기의 고분이 있는데 현장에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익산에도 미륵사지에 국립박물관이 있다. 친하게 지내는 성()이 반남 박씨인데 어찌나 양반이라고 자랑을 하는지 모른다. 나는 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반남 박씨가 있는 줄도 몰랐다. 성이 침이 마르게 자랑하는 그 반남에 왔다. 앞으로 더 잘 통할 것 같다.

마한 사람들이 새(마리미)를 좋아했는데 새가 하늘의 신에게 소원을 전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새의 날개모양 토기와 항아리에 새의 발가락무늬를 넣었다. 금동관도 보았다. 금동관은 안에 모관과 바깥의 대관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신라 외관은 모양이 자 형인데 이곳의 것은 불꽃 모양이어서 더 오래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존상태가 양호해 백제관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중요한 유물이다.

금동신발도 보았다. 신발은 죽은 후에 좋은 곳으로 가라고 무덤 속에 함께 넣어 주었다. 금동신발 밑에 물고기 모양이 있는데, 일본의 금동신발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2000년 전 마한과 일본은 친했고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복암리 근동 정촌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엔 용머리장식이 있다.

금동신발은 양쪽 옆면과 바닥을 따로 만든 후 이들을 이어 완성했다. 신발 몸체는 작은 육각형을 상하좌우로 맞닿도록 배치하여 만들었다. 육각형안에는 상상의 동물과 불꽃 등이 투각되어 있다. 양쪽 신발은 육각형의 수와 동물의 종류와 생김새가 다르다.

박물관은 1회 입장객을 제한해 다 둘러보고 나오면 다시 입장객을 받아 번잡하지 않고 코로나19 위험도 적다. 복암리 고분전시관이나 백호 문학관은 우리 넷이서 전세를 냈었는데.

박물관 밖은 넓고 핑크뮬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맛도 좋다. 언니가 오늘 여행 중 어느 곳이 제일 좋았냐고 물었다. K마냥 추천해 줄 곳이 설마 점심 먹은 식당이라고 할까 봐 걱정되었나 보다. 처음부터 별로 구경할 것 없다고 하더니.

나는 자신 있게 복암리 고분전시관이라고 크게 대답했다. “우리 처제가 구경 잘했다고 하면 다 된 거야.” 형부가 흐뭇해했다.

 

2021.10.26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한 번도 발길이 닿지 않았던 나주 저에게는 미지의 땅 입니다. 이상하게도 나주에사는 사람과 연을 맺지 못해서 일겁니다. 선생님의 글을 대하며 마한의 땅으로 고분군이 있으며, 임제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았습니다. 그래서였던가 봅니다. 지난해 수원에 사는 여자 제자(지금 세 아이의 할머니)가 나주 곰탕을 한 박스 선물로 보냈더군요. 선생님의 글을 보니 나주의 3대 음식 중에 하나였는데 저는 깜깜이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꼭 나주에 가 보려고 작정하며 선셍님의 글을 두 번이나 정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