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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저 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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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언홍 댓글 2건 조회 735회 작성일 21-12-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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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아 서둘러 물통을 차에 실었다. 가파른 산길을 돌고 돌아 약수터에 도착하고 보니 앞서 온 사람들의 물통이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서있다. 

차례를 기다리느라 한쪽으로 비켜서 있으려니 약수터 곁에 세워둔 안내판 한쪽에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지 한 장이 눈길을 끈다. 보호시설에 의탁 되어있던 노인이 시설을 빠져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진 속 노인의 기름한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끼어 있다. 눈매가 선해 보이는 할머니가 사진 속에서 환히 웃는다.


 우리 마을 끝자락 과수원에는 백수를 눈앞에 둔 노인이 아들과 살고있다. 창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다가 나를 발견 하고는 오라고 손짓 했다. 두서없이 흐트러진 흰머리 사이로 푹 까진 두 눈이 왠지 섬뜩해 쉬 다가가지지 않는데, 거듭된 노인의 성화에 마지못해 거실로 발을 들여놓으니 때에 절어 꼬질꼬질한 가죽 소파 한쪽을 치우며 앉으라고 권했다. 주방과 거실의 경계가 없는 너른 바닥 한구석에 바싹 마른걸레가 한겨울 명태처럼 뒹굴었다. 노인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꺼내놓았다. 한사코 도리질 해도 손에 쥐여 주며 먹어보라고 한다. 건조대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노인의 방엔 한낮인데도 이부자리가 어수선하게 깔렸다. 쉴새 없이 지껄여 대는 노인의 얼굴은 백납을 씌운 것처럼 새하얗고, 쪼글쪼글한 손등이 먹을 갈아 찍은 것처럼 검버섯들로 얼룩덜룩했다.

  우울한 거실풍경과 노인에게서 풍겨나오는 이상한 냄새에 얼른 일어나고 싶었지만 얼마나 외로웠으면 나를 그리 불렀을까 하는 생각에 선뜻 일어서질 못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손자 자랑을 한보따리쯤 풀어놓더니 배즙 한 봉을 가위로 잘라 내밀었다. 차마 그마져도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고 앉아 있노라니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던 노인이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가 빠진 탓인지 발음도 어눌한 노인의 이야기를 새겨들으며 나는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가 잘 안들리는 노인에게 무어라 대꾸해본들 동문서답이라, 잠시 앉았다 일어서는 내 등 뒤에서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저 자다가 죽어야 할 텐데."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을 때의 일이다. 돌아가신 분의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누가 물으니 일흔아홉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사실만큼 사셨네." 

  "자식들이 아쉬워할 때 가신 것이 좋은 거야!" 

  사실만큼 산 나이라는 게 있는 걸까. 부모가 얼마만큼 살아야 자식들이 아쉬워하는 나이일까. 여든아홉 내 어머니가 백세를 채우고 돌아가신다 한들 안타까움만 남을 것 같은데. 

 '그저 자다가 죽어야 할텐데.' 노인의 중얼거림이 이명처럼 귀를 울려댄다. 혹여 내 어머니도 저러고 계신 것은 아닌지........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요즘들어 부쩍 어떻게 살다가 이승을 하직하는 게 바람직한 삶을 누리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길거리 모퉁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요양병원에 끝없이 늘어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어지럽다. 백세 세대에 신이 허락하는 삶을 누리다가 곱고 품위있는 자태를 유지하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꿈이며 허욕이 아닐지? 그 할머니가 우리의 미래 모습과 닮은 구석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헤겠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세모 건강하고 보람되십시오.

김언홍님의 댓글

김언홍 작성일

교수님 안녕 하시지요.
늘 변함없이 거기 그 자리에 계셔서 참 고맙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는 용문산 산책로에 먼길 마다않고
찾아오는 객들을 말없이 반겨주는 노송이  있지요. 그 노송이 웬지 교수님을 닮았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한결같은 청정한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듯 우람이 서있지요.
교수님 오래도록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