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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날지도 울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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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955회 작성일 22-03-2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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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도 울지도 않는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고대 중국의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인 장왕은 부왕인 목왕(穆王)의 급서(急逝)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를 승계하면서 홍수와 기근을 비롯해 반란 등으로 겪으며 어려움에 처했지만 다행히도 위기를 잘 극복했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사를 비롯해 조회 등을 외면한 채 주야장천 가무음곡(歌舞音曲)에 푹 빠져 나라꼴이 엉망이었고 국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집무실 앞에 ‘감히 간(諫)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리라’는 “감간자사(敢諫者死)”라는 섬뜩한 경고 패찰까지 게시하는 괴이한 행동까지 거리낌 없이 했다.


군왕이 성군이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3년이 지나면서 뜻있는 대신들이 국사에 최선을 다하시라고 고언을 거듭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봤어도 나랏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왕의 마음을 돌릴 길이 없어 모두가 입을 꼭 다물고 다소곳이 눈치를 볼밖에 속수무책으로 끙끙 앓았다. 속수무책의 혼란기를 호기라고 판단한 모리배와 간신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국정을 농단하는 폐해가 도처에서 숱하게 횡행했다.


이에 대해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중언편(重言篇)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예사롭지 않다고 걱정해 오던 오거(伍擧)가 어전에서 이런 질문을 화두처럼 툭 던졌다. “남쪽 언덕위에 새 한 마리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그 새는 어떤 새입니까?(有鳥 止於南方之阜 不飛不鳴 是何鳥也)” 이에 대한 왕의 대답이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기 때문에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며, 3년 동안 울지 않았기 때문에 울었다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이르며, 경의 뜻을 익히 알고 있으니 물러가시오”라고 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도통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분기탱천했던 충신 소종(蘇從)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직간(直諫)했다. 그러자 진노한 왕이 밖에 “감간자사(敢諫者死)”라는 팻말이 보이지 않더냐며 힐책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소종은 “이 한 몸 죽어 성상을 깨우치는 것이 신의 바람 입니다”라고 되받았다.


계속되는 충신들의 충정어린 언행에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에 대오 각성한 왕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비상한 각오를 하고 일어서 지난 몇 해 동안 주도면밀하게 낱낱이 파악해 두었던 간신 무리들을 암 덩어리를 들어내듯이 일거에 척결했다. 아울러 오거와 소종 같은 충신들에게 나랏일의 실권을 과감하게 위임해 크게 성공을 거둠으로써 춘추오패(春秋五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사기(史記)의 골계열전(滑稽列傳)에서 순우곤(淳于髡)이 했던 얘기에도 이 내용이 똑 같이 나온다. 여기서 왕은 제나라 위왕(威王)이다. 위왕 역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과 음악과 여자에 푹 빠져 3년을 지냈지만 어느 신하도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이 때 순우곤이 위왕에게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새’ 즉 불비불명(不蜚不鳴)의 새가 무슨 새인지 여쭸다. 이에 위왕은 ‘한 번 날면 하늘에 오르며,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문득 순우곤의 참뜻을 깨달으면서 마침내 간신들을 척결하고 국정을 바로 이끌어 혁혁한 치적을 이루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기에는 여씨춘추와 달리 “삼년불비 우불명(三年不蜚 又不鳴)”으로 표기되었다는 전언이다.


외형적으로는 부왕의 급서(急逝)로 얼결에 왕위를 승계한 어린 장왕은 모자란 척, 주색잡기에 빠진 척하며 허송세월하는 바보처럼 비춰졌으리라. 노회(老獪)한 대신들 틈바구니에서 어린 왕이 살아남으려는 지혜이자 생존 전략이었을 게다. 일부러 어벙하게 행동하는 과정에서 간신과 충신을 정확히 파악하며 힘을 길러 훗날 기회를 포착했을 때 자신의 꿈을 도모하기 위한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맥락에서 불비불명은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오랫동안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합당한 해석이리라. 다시 말하면 ‘유능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일단 뜻을 펼치게 된다면 크게 이룬다’는 긍정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 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불과 얼마 뒤 춘삼월엔 대선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 캠프에는 입신양명이라는 로또 당첨을 꿈꾸는 불나방 같은 정치꾼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 같다. 그들 중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대선 후보자들은 그들 중 참된 인재를 주의 깊게 살폈다가 중용해 국정을 바로 펼치려는 맥락에서 ‘불비불명’의 참뜻을 되새길 수 있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나무랄 데 없는 인품을 갖춘 후보라고 확신이 들면 여야를 불문하고 의심 없이 “꾹! 한 표를 찍어줄 터인데”. 왜 이런 불신이 저변에 깔려있는 걸까. 지난날 총선이든 대선이든 누군가를 찍어주고 나서 후회 막급하여 투표했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었던 후회를 숱하게 되풀이했던 아픈 기억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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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오패(春秋五覇) :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말한다. 춘추시대의 5대 강국을 이르기도 한다. 춘추오패는 제나라의 환공(桓公), 진나라의 문공(文公), 초나라의 장왕(莊王),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진나라의 목공(穆公), 송나라의 양공(襄公) 또는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기도 한다.


경남문학, 2022년 봄호(통권 138), 2022년 3월 5일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댓글목록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아마 대선 끝난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자기 손가락을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아요.ㅋ
어수선한 시국입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겠지요.^^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지긋지긋한 내로남불 정권을 끝냈다는 것만도 만세를 부를 일입니다. 새 정부가 일을 잘하냐 못 하냐는 차츰 평가할 일이고요. 박수를 보내든 회초리를 들든 그건 차후 이야기이고 지금은 너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