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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만경강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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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723회 작성일 22-03-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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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을 걷다

윤복순

 

지난 주 선유도에 가면서 만경강을 지났다. 불현 듯 그 강을 걷고 싶어졌다. 학교 다닐 때 매일 건넜던 강이다. 우리 동네는 김제지만 중학교부터는 익산으로 다녔다.

목천포에서 비비정까지 걸을 생각으로 시내버스를 탔다. 터미널까지 가는 노선은 많고 터미널에서 목천포 가는 버스도 많다. 오랜만에 걷는 만경강이다. 몇 년 전부터 만경강 안의 논에 농사를 짓지 않아 갈대밭이 되었다. 그곳에 산책로를 만들고 둑 밑에 자전거도로를 만들었다. 물론 차도도 있다. 차도엔 벚나무를 심어 봄이면 벚꽃터널이 된다.

목천포는 내게 최초의 도회지다. 우리 동네는 열여섯 가호가 사는 아주 작은 동네였다. 동네 밖을 벗어나는 일은 학교 가는 것이 유일했다. 초등학교는 1시간여 걸어서 다녔고 그 길엔 아무 동네도 없다. 산길뿐이다.

3학년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고모네 집에 가시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처음 버스를 타보았고 아니 차를 처음 보았다. 군산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목천포에서 내렸다. 그곳엔 산도 없고 가게도 있고 차들도 다녔다. 도시라고 생각했다.

목천포는 중요했다. 전주든 군산이든 김제든 이곳을 거쳐야만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통팔달 도로가 생기면서 익산의 변두리가 되어갔다. 친정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 목천포 다리를 건널 일은 양 명절 산소 다녀올 때뿐이다.

오랜만에 가보니 목천포에 만경강 문화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한지 얼마 안 돼 안내 책자 하나 없다. 1 2층을 구경하고 옥상에 올랐다. 전망대에 서니 가슴이 뻥 뚫린다. 문화관의 내용보다 햇빛이 좋고 시야가 툭 트여 자체로 힐링이 된다. 무엇보다 쇠락해 가는 이곳에 새로운 것이 생겼다는 게 좋다.

예날 다리(구 만경교)가 일부만 보인다. 환경과 안전에 문제가 있어 철거하려 했는데 문인들이 작품으로 많이 썼기에 유산으로 남겨둔다는 내용이다. 나무로 멋을 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편안하다. 중학교 때 기차 통학을 하다 시내버스가 생겨 이 다리로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대학교 까지. 이 만큼이라도 남아있어 다행이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음이 따뜻하다.

날씨가 좋아 자전거 타는 사람, 마라톤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차도 심심찮게 다닌다. 갈대숲 생태길로 걸었다. 걷기 좋게 되어있다. 강 건너 백구 쪽을 보며 통학하던 시절 동네 이름들을 뇌어보는 재미도 좋다.

 

만경강은 춘포에서 물이 많아진다. 여기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춘포는 봄이 드나드는 나루라는 뜻으로 봄개라고 불렸다. 춘포정과 춘포문학마당이 있다. 이병기, 소세양, 홍석영,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안도현, 이정하, 정양 등의 문학비가 있다. 이들의 글을 읽으며 잠시 문학소녀로 돌아가 본다.

재작년 가을, 약사 문인 두 명이 서울에서 왔다. 황금 들녘과 코스모스, 하얀 억새와 갈대, 높고 푸른 하늘과 옅은 구름, 양팔을 벌리고 맘껏 자연을 즐기며 행복했던 그날이 생생하다. 서울 사람들이 익산이 이토록 순정한지 몰랐다고, 또 오고 싶다고,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다고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 만경강이다.

문학마당을 지나니 호소카와 농장의 농업기술자였던 에토가 살았던 집이 가깝게 보인다. 일제가 춘포를 큰 마당을 뜻하는 대장으로 바꿔 부르면서 변화와 수탈이 시작 되었다. 만경강은 백만 이랑이라는 뜻의 넓은 들을 의미한다. 호소카와는 후작이라는 정치력을 등에 업고 국가 소유의 미개간지였던 만경강 일대를 간척하고 불하받는 방법으로 농지를 점유했다. 이 농장이 소유한 땅만 30만평이고,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에만 이런 농장이 9개였다고 한다.

쌀 도정공장도 필요했고 일본으로 실어 나를 운반수단도 필요했다. 전군가도 신작로가 생기고 전라선 철길이 춘포 앞을 지나게 되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막대한 쌀을 반출했다. 도정공장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 춘포역이 우리나라 간이역 중 역사가 제일 깊다. 지금은 선로와 단절된 채 건물만 남아 있다. 중학교 때 짝꿍은 전라선 통학생이었다. 그 애가 대장촌에서 다닌다고 했다. 대장촌이란 이름이 일제의 잔재인 줄도 모르고 너희 동네가 촌(시골) 중에서 대장이냐고 놀렸었는데.

 

춘포를 지나 꽤나 걸으니 완주군이다. 삼례 비비정까지는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지 방향만 있지 거리표시는 없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삼례 한내다리로 모래찜을 하러 간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딘지 이번 참에 알아봐야겠다. 지쳐갈 즈음 비비정이 보이고 강에 새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 걷는 동안 몇 군데에서 겨울 철새들을 봤지만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비비정 마을은 삼례의 만경강 초입으로 전주천 소양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예전에 큰 개천이란 뜻의 한내라고 불렀다. 한내의 눈부신 모래 빛이 유명해 모래찜을 위해 관광객이 찾았던 곳이란 안내가 있다.

고고한 달빛 아래서 고기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물결을 찾아 기러기 떼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내려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물오리 떼들이 두 군데나 그리 많이 있었구나. 비비낙안(飛飛落雁)이다. 경치도 아름답다.

모래찜을 하던 곳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직강(直江)공사로 강안으로 제방이 들어서고 갈대와 풀등이 자리를 잡으면서 모래밭도 사라졌다. 지금까지 고운 모래밭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대단한 관광지가 될 텐데. 나도 모래찜을 하러 왔을 것이다.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한국철도시설공단은 기능이 중단된 철교를 철거하려 했는데 인근 주민과 완주군이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지역 애환이 담겨 있어 보존하자는 의견을 내 등록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현재 카페 겸 복합문화쉼터로 구성된 열차는 비비정 예술열차란 이름으로 만경강의 명물이다. 무궁화호 4칸을 구입해 만들었다고 한다.

비비정에 앉아 모래찜을 했을 것 같은 곳을 찾아보며 5시간 넘게 걸은 다리를 쉬어 본다. 다음엔 봉동까지, 그 다음엔 고산까지, 그 그다음엔 발원지 밤샘까지 거를 계획을 세웠다. 만경강 완주할 생각에 바람 난 처녀 마냥 가슴이 울렁거린다.

 

2022.3.6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만경강'이라는 이름을 대하는 순간 대학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60년대 중반 '김제 백구'에 사는 동창이 있어 여러명이 어울려 놀러 갔다가 무슨 일인가 있어 만경강을 찾았던 기억이 이스라히 남아 있답니다. 그 친구와 매우 친했었는데 중간에 일본인가 어디로 떠난 이후는 감감 무소식...., 또 "이리(익산)" 남성고등학교 출신인 대학 동창에게서 언젠가 자기 고향이 고향이 "춘포"라던 얘기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네요. "만경강"을 저도 마음 속으로 함께 걸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삼례 비비정에서 노래하는 완주군 가수가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  15곡이 수록된 CD를 갖다줬어요.
우리 또래가 좋아하는 곡들이 많아요.
만경강 걷기의 추억이 더 풍성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