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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벚꽃 길 가다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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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훌쩍 벚꽃 길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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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래여 댓글 4건 조회 681회 작성일 22-04-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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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벚꽃 길 가다.

      박래여


 등 너머 벚꽃 길이 생각났다. 아침 설거지를 대충하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 어릴 때는 김밥 싸 들고 가서 놀던 자리, 고사리 꺾다가 새참과 일꾼을 모시고 가서 꽃을 즐기던 자리, 백 년이 넘은 고목나무 벚꽃길이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사월 이맘때는 등 너머 그 길을 오가는 것만도 황홀하다. 몇 해 전부터 집 앞도 벚꽃 가로수다. 우리 집 앞에서 시작된 벚꽃 길은 등을 넘어 합천 삼가로 이어지고 자굴산과 한우산으로 이어진다.


 만개한 벚꽃 길을 달릴 생각에 마음도 몸도 가뿐하게 집을 나섰다. 천천히 집 모롱이를 돌아 오르며 감탄사 대신 한숨이 나온다. 양쪽으로 심어진 벚나무 가로수 길은 화사하게 어우러졌을 줄 알았다. 진해 벚꽃 길처럼 꽃 터널이 되어 있을 줄 알다가 현실을 목격하자 울컥 분노가 인다. 벚나무가 흉하다. 강제로 잘라낸 가지들, 뭉툭뭉툭 잘려나간 상처자국이 둥글다.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가 서로 손잡을 듯 어우러지련만 인간이 만든 상처만 돋보인다. 환경정화작업은 가로수를 고통 주고 괴롭히는 일이다.


 여긴 호젓한 산길이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것에 가로수가 거치적거릴 것도 없다. 자연 그대로 두어도 좋을 자리다. 나무는 자리만 잡아주면 저절로 모양을 내고 주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만든다. 나무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나 좀 괴롭히지 마. 날 좀 가만 내버려 둬.’ 졸속행정은 여전하다. 가로수를 몽땅 연필로 만드는 것은 예사고 윗대가리가 바뀔 때마다 멀쩡한 가로수를 파내고 다시 심는 것이 일이다. ‘내가 거기 담당자로 있을 때 조성했다.’는 이름 석 자 남기려는 인간의 탐욕에 가로수는 괴롭다. 심었다 자르고 다시 심는 가로수에 혈세만 낭비된다.


 다행히 저수지 쪽으로 늘어진 백 년도 더 된 고목 벚나무는 여전히 아름답게 만개했다. 푸른 못 쪽으로 꽃가지를 늘어뜨린 것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동네 입구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걸었다. 행정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었다고 들었다. 고목 벚나무 몇 그루도 그때 심은 확률이 높다. 나무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세월의 흔적만 봐도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것 같다. 푸른 저수지에 회색 두루미 한 마리 평화롭게 날아오른다. 청둥오리는 고기를 낚고, 종이배처럼 떠다닌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 삼십 수 년 전 농촌에 시집와서 농부와 걸었던 길, 그땐 고목나무가 더 빼곡했고, 더 아름다웠다. 도로는 흙길이었고, 벚나무 아래 개울에서 천렵을 했었다. 그 못에는 1급수에만 산다던 빙어가 떼를 지어 살았다. 그물로 빙어를 잡아 그 자리에서 초장에 찍어 먹던 청년들, 살아서 벌떡거리는 생물을 먹으라고 내밀던 농부의 친구도 저승길 갔다.


 추억이 있는 곳, 내가 늙어가는 사이 저수지 주변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렇구나. 무릉도원은 내 마음에 있고 추억은 늙지 않는구나. ‘가로수 담당하는 관공서 사람들아! 나무를 자르고 싶거든 전문가를 대라. 가출했던 딸내미 잡아들인 폭력 아버지가 가위를 들고 제멋대로 잘라버린 딸내미 머리카락 같이 볼썽사납게 전지하지 마라. 나무도 고통스럽다. 자연과 어우러지게 가만 놔둬라. 혈세 들여가며 나무 괴롭히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예스럽다는 것은 거기서 연륜을 읽어낼 수 있기에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소리치고 싶다. 도시의 가로수라면 이해라도 하련만.


 그래도 벚꽃은 아름답다. 저수지는 푸른 호수다. 호수 가에 놓인 빈 의자가 온기를 그리워한다. 의자에 앉아 벚꽃을 바라보고 바람이 슬쩍 건들고 가면 하얀 나비 떼가 푸른 못으로 떨어진다. 동동 떠다니는 꽃잎을 바라보며 시간을 잊었다. 말을 걸 사람도 없는 고즈넉함이 좋다. 발 옆에서 발름거리는 제비꽃이 웃는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저 혼자 핀 아름다운 야생화들, 벚꽃 잎 하나 사뿐히 내려앉는다. 벚꽃 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호수를 가른다. 은파가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잃지 않기를.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우라 아파트는 지난 겨울 전문업체에게 맡겨 정원수 모두를 심하게 전정(剪定)해서 지금 앙상한 모양으로 봄이왔음에도벚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아닌지 모를 지경이랍니다. 작년엔 벚꽃 터널을 이뤘었는데..... 그리고 우리 아파트 옆 아파트 가로수로 심은 메타스퀘이어 나무 그늘의 피해가 심하다는 민원에 따라 모든 가지를 100% 잘라 지금은 옛날 낙엽송 전봇대 같이  삭막한 모습으로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답니다.

벚꽃이 만개해 화사하더니 어느덧 거의 다 지고, 지금은 진달래까지 지려고 하네요. 아름다운 봄꽃은 또 한 해를 기다려야 다시 볼것 같습니다. 즐겁고 보람된 나날 되세요.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진짜 가로수 수난시대라는 말을 하게 되더이다. 왜 그런 행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일자리 창출의 하나로 나무자르기가 있는지. ㅋ
진짜 중대가리 되어 몸통만 있는 가로수를 보면 가슴 아파요. 예전에 중국 여행길에 소나무가 지붕 중앙을 뚫고 올라갔는데도 그 나무를 자르지 않은 것이 너무 신기했어요.^^

김언홍님의 댓글

김언홍 작성일

은파 ~ 내가 좋아하는 단어중 하나인데....
저도 요즘 벚꽂 구경다니며 눈호강 했습니다.
마당에 이십년도 더 된 매실 나무를 뭉텅 잘라버려 무척 서운 했었는데 벚꽃구경으로 땜방했네요.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우리 집 마당가의 산딸나무는 저절로 죽어버리더라고요. 20년이 넘었는데. ㅋ
이팝나무 역시 태풍에 밑둥이 부러져버렸어요. 지난해.......기분이 묘했어요. 꼭 내가 죽을 건데 나무들이 대신 죽는 것 같더라고요.ㅋ
은파는 저도 좋아하는 낱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