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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부의 제주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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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777회 작성일 22-05-03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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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제주 나들이


부부가 제주도에 다녀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꼼짝없이 두 해 동안 집에 갇혀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나섰던 동행 길이었다. 지난해 동짓달 초순 무렵이었다. B대학교 교수인 제자 H박사의 전화였다. 다음해 정월 제주에서 학회가 개최되는데 “그 시기에 맞춰 교수님 내외분을 제주로 모시고 싶다”고. 그동안 세 차례 유사한 신세를 졌던 전과(前科) 때문에 송구한 마음에 엉거주춤하게 얼버무린 채 통화를 끝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신년인 임인년 초순(1월 12~14일)에 부부의 제주도 왕복 항공권(부산~제주). 호텔 숙식권, 승용차 렌트한 내용을 전송해왔다. 내심 흐뭇했지만 염치가 없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잠자코 납작 엎드려 있었다.

올해 일흔 여덟으로 정년을 맞고 일터에서 물러선지 12년째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노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H박사는 정년 직전인 2009에 제주도 여행을 하도록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조치를 했었다. 그리고 2012년엔 나와 아내를 중국 청도(靑島 : tsingtao)의 여행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2017년에 내게 일본의 홋가이도(ほっかいどう) 여행을 하도록 준비하고 모든 경비를 통째로 감당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부부의 항공권, 호텔 숙식권, 렌터카 비용을 위시해서 관광지를 다니며 마신 차 값과 점심 식대까지 모두 제공했다. 하도 미안해서 둘째 날 점심 식대를 몰래 계산했던 몇 만원이 이번 나들이에서 유일한 지출이었다.


H박사는 지금도 모 학회 회장이다. 따라서 매년 1회 이상 학술발표 행사를 국내외 어디선가 개최한다. 그렇게 나라 안팎에서 학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여유가 생길 때마다 사비(私費)를 들여 우리 부부를 초대하곤 했다. 이 번 제주 행사도 그 하나이다. 이 학회에 또 다른 제자이며 K대학 교수인 C박사가 부회장이다. 그런데 회장이며 선배인 H박사와 C박사가 합의 결과 우리 부부가 제주에 머무는 동안 C박사가 관광지를 안내하며 운전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귀띔이었다. 한편 상식적으로 볼 때 교수의 급여만으로는 자기 은사를 반복해 모시고 대접할 만큼 부의 축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H박사는 아주 오래 전 친구와 IT 벤처회사를 창업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고 코스닥에 상장시킴으로써 상당한 부를 일궈낸 벤처기업 선구자로 풍족할 정도의 재력을 여퉜기에 베풀 기본적인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는 관점에서 H박사의 인품을 짐작케 한다.


지난 12일 낮 12시 반쯤에 제주 공항을 빠져 나왔다. 제자 C박사가 마중 나와 맞았다. 승용차를 운전하며 학회 회장인 H박사는 참석한 간부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식당에 먼저 갔다고 했다. 얼추 낮 1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약속된 식당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 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H박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며 제주에 머무는 동안 편하게 지내시다가 돌아가시라는 덕담을 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C박사를 가리키면서 2박3일 동안  편히 운전하며 모실 것이라는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웠다. 자기는 지금 행사를 진행하는 중이라 제대로 챙기지 못하더라도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C박사에게 말씀하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자리가 파할 무렵 H박사가 아내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며 용돈을 조금 넣었다했다. 당황한 아내가 한사코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중간에 어디서 확인할 기회가 없었는데 다행히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봉투가 생각났다며 펴들던 아내가 놀랐다. 용돈치고는 과한데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무척이나 고맙다고 했다.


두 제자들의 정성은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데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조금 미웠다. 제주에 머무는 사흘 내내 눈이 내리는가 하면 하늘이 무너질 듯 구름이 잔뜩 내려앉으며 심통을 부렸다. 아주 조용하고 찬찬한 성격의 C박사는 연신 일기예보를 체크하면서 눈이 쌓여 미끄러운 한라산 쪽의 길을 피해 해안 쪽의 도로를 검색해 찾아다니며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가이드 노릇을 했다. 어떻게 현지 지리를 잘 꿰고 있는지 신기해서 물었더니 이전에 가족과 여행을 오거나 학회 참석 때문에 몇 차례 제주에 왔을 때 익혔다고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번에 제주에 오면서 인터넷을 뒤지며 일주일 동안 공부를 했을 뿐 아니라 가깝게 지내는 제주대학교 교수에게 몇 차례 자문을 구하는 정성을 쏟았던 결과였다. 원래는 C박사의 아내인 M박사도 이번에 함께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공적인 일이 돌발해 참석하지 못해 무척 서운하고 아쉬웠다. 불손한 날씨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낯선 길임에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우리 부부를 위해 관광 가이드 겸 드라이버 노릇을 해준 C박사에게 엄청 큰 신세를 졌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갚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꿈같은 부부의 여로였다. 어느 모로 생각해도 늙어가는 은사 부부일 뿐인데 거금을 쾌척해 나들이 길을 열어준 H박사와 사흘 동안 이른 아침부터 어두운 밤까지 운전기사를 기꺼이 감당했던 C박사에게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제자들에게 돌려줄 게 하나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하면서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으며 스스로를 잘 지키는 게 올곧게 보답하는 참된 도리이고 정도(正道)가 아닐까 싶다. 어제 저녁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H박사와 C박사에게 감사했으며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메일(E-Mail)을 보내자 곧바로 득달같이 답신들이 돌아왔다. 한결같이 “건강한 모습 뵈어서 좋았고 앞으로도 건강하시라”고.


한맥문학동인사화집, 제 22호, 2022년 4월 12일
(2022년 1월 15일 토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참 훌륭한 제자들을 두셨군요. 아니 선생님이 참 훌륭한 스승님이셨다는 게 이 글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돈이 많다고 인정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런 대접 받을 만한 사람에게 베품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인생을 참 잘 사신 겁니다.
예전에  황순원 선생님 사후  제자들이 매년 기제 지내러 다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인 소설가 고원정이 있는데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 당선작으로 거의 뽑혔는데
 황순원 선생이 심사위원장이셨고 애제자 고원정을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제자이기 때문에요. 그런데도 고원정 소설가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해했고 변함없이 선생을 기리는데 앞장섰다고 하더군요.
범인들이라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스승이라고 펄펄 뛰지 않았을까 싶네요. 소인배인 저부터 그랬을 걸요.  ㅎㅎ
참스승의 모습을 보였으니 황순원 선생의 제자들이나 선생님의 제자 분들이 그렇게 극진하지 않을까요?
흐뭇한 이야기 읽으며 덩달아 흐뭇했습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요^^

이분남님의 댓글

이분남 작성일

한교수님!
건강하시고 잘 계시지요?
오랬동안 못뵈었습니다.
참스승의 표상이신 교수님이심을 제자들이 인정해주시네요.
사모님과 참 좋은 시간되셔서 보람이 있으셨지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