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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부의 잠자리 사이를 파고 드는 과똑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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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4건 조회 62회 작성일 20-03-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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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잠자리 사이를 파고 드는 과똑똑이

 

자기 방 타령을 해온지 네다섯 해쯤 되나보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며 침대를 읊어댔다. 식구래야 우리 내외와 유진이가 전부로 달랑 세 식구인 관계로 네 개의 침실 중에서 하나를 손주에게 통째로 넘겨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 둥지에서의 삶이 외롭고 쓸쓸할 것 같아 잠자리는 늘 함께 했다. 내외가 늙어가며 척추 문제로 침대를 없애고 방바닥에 커다란 요를 널찍하게 펴고 양 옆엔 나와 아내, 가운데는 유진이가 눕는 잠자리를 원칙으로 지켜왔다. 그럼에도 여려 해 동안 줄기차게 침대와 자기 방을 주장해서 중학교 입학 무렵이 되면 절절한 소원을 들어 주겠노라고 내약(內約)을 했었다.

 

지난 해 섣달 중순 현재의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를 하면서 유진이에게 했던 말빚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마침 올봄 중학교에 진학하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뤘던 약속의 채무를 완벽하게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 방에는 침대만 넣어둠으로써 오직 잠을 자는 방으로 쓰임새를 결정했다. 그리고 공부는 나와 함께 서재에서 하기로 합의하고 유진이의 책상이나 책장은 침실과 격리시켰다. 만일 책상과 침대를 같은 방에 배치하면 아무 때나 틈이 생기면 침대로 기어드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처음엔 신이 나서 ~루 랄~흥얼대며 사랑땜을 했다. 그렇게 새 침대와 침구에 대책 없이 매료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드는가 싶더니 시들해졌는지 시큰둥한 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사춘기를 맞았다고 으르렁거리지만 아직은 구상유취(口尙乳臭)를 숨길 수 없는 과똑똑이일까. 처음 며칠 밤은 제 방에서 다소곳이 잠을 자며 정을 붙이는가 싶었다. 하지만 웬걸. 갓난아기 때부터 우리 내외 사이에 누워 잠드는 것이 버릇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텅 빈 방에서 홀로 잔다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고 편편치 않았으리라. 이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봤던 귀신이나 무서운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지 싶다. 그 상황에서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묘책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밤 제 할머니에게 귀신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 방의 벽에 십자고상을 걸어달라는 생뚱맞은 주문을 했다. 비록 유아세례를 통해 미카엘이라는 세례명까지 받고 나서 발을 끊고 냉담 중인 얼치기 신자일지라도 연을 무시할 수 없던 이끌림 때문이었을까.

 

여러 모로 속속들이 뜯어봐도 유진이 방은 쾌적하고 밝고 따뜻하며 새로 장만한 새 침대가 썩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어린 아기 때부터 열네 해째 온몸으로 체득한 잠자리 분위기를 떨쳐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아 보인다. 자기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밤 12~1시쯤 되면 이불과 베개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우리 내외의 침실로 살금살금 파고 들기를 되풀이하는 무뢰한이자 과똑똑이다. 그런 무례함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시침을 뚝 뗀 채 당당히 자리 잡으며 이죽거리기 일쑤다. 자기 방에서 자려다가 귀신이나 무서운 꿈을 꿨다면서 소곤대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표표히 꿈나라 여행을 떠나 버린다. 쓸데없는 유진이 얘기에 맞장구를 치다보면 어느 결에 잠이 싹 달아나는 까닭에 궁싯거려야 하는 낭패에 휩싸인 적도 숱하다. 지난밤에도 새벽 1시 넘어 몰래 파고들어 뭔가를 조잘거려 못 들은 척하고 한쪽으로 돌아 누웠다가 깜빡 잠 들었지 싶다. 퍼뜩 정신이 들어 손주를 찾았더니 내가 외면했던 게 비위가 거슬리고 괘씸했었는지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휑뎅그렁하게 큰 방에서 내외가 나란히 누우면 둘 사이 빈 공간이 운동장같이 넓다. 그런 때문에 유진이가 언제 어떤 형태로 파고 들어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잠버릇이 문제였다. 밤새도록 이리 저리 구르면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어 자칫 잘못하면 떠꺼머리 같은 총각의 억센 발길에 차이거나 함부로 뻗어대는 팔에 얻어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손주가 가운데 누워 잠을 잘 때면 우리 내외는 항상 한쪽 끝으로 옮겨가서 잔뜩 웅크린 채 부지불식간에 발생할 봉변에 대비하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손주가 밤손님처럼 몰래 숨어들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평하게 잠든 순수한 모습을 보노라면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흐뭇하다.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 내외의 품을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으로 알고 둥지를 틀었던 파랑새가 중학교에 입학을 앞두었으니 어찌 미쁘지 않을 손가. 하기야 중국의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코로나-19(COVID-19)가 팬데믹(pandemic) 현상을 보이며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엿한 중학생일 터인데 아직 입학 대기 중이다.

 

언제까지 우리 내외의 품을 끈질기게 파고 들까. 아마도 열네 살이라는 나이와 하루가 다르게 우람해지는 덩치를 감안할 때 길게 지속될 개연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에서 툭하면 바람결처럼 파고드는 도령에게 기분 좋게 립서비스(lip service)를 날려준다. “유진이가 밤중에 찾아와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일어나 앉아 이불을 잘 펼쳐서 덮어주며 잘 자라고 토닥여준다”. 그러면 기분이 좋은지 오밤중임에도 하고픈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푼수이기도 하다. 한편 진정 어떤 목적으로 그런 응석받이 같이 귀여운 행동을 반복할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파고드는 불한당이나 왈패의 삐뚤어진 행동과는 사뭇 다르다. 때로는 혼자서 외로이 누웠을 때 잠은 안 오고 뭇생각에 빠졌다가 무서운 장면이나 귀신이 떠올라 두려움이 엄습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그에 비해 발칙하고 의뭉한 속내를 넌지시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언가를 꼭 하고 싶거나 가지고 싶을 때 정식으로 얘기해 허락받기 민망하거나 껄끄러울 때 파고드는 경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럴 경우 부부 사이에 은밀히 이루어지던 베갯머리송사같이 잠자리라는 느슨하게 녹록해진 틈새를 잽싸게 이용해 얼렁뚱땅 해결의 실마리를 거머쥐려는 멀쩡한 소견이 넌지시 엿보이기도 한다. 그럴 경우 대부분 백기를 드는 쪽은 나로서 어이가 없어 그저 헤헤거리며 할 말을 잃고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하는 게 고작이다.

 

2020310일 화요일


댓글목록

임영숙님의 댓글

임영숙 작성일

교복을 입고 아직 교정에 들어가지 못한 유진이의 중학생활을 응원합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와우, 우리 미카엘 형제가 마마보이가 아니라 할배보이가 되는 건 아닐까요?^*^
교수님 글이 너무나 흐뭇하고 행복하고 따스합니다.
아빠 엄마는 아니지만
가정의 포근함이라는 건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 유진이를 위한 빈자리 같은 거 아닐까 싶습니다.
유진이가 어린시절 저리 자랄 수 있다는 게 또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요.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에서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 관계가
교수님 댁처럼 아름다운 가정은 없지 싶습니다.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유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군요. 참 세월 빠르네요.ㅋ 조부모님의 사랑으로 밝고 환하게 자라는 유진이를 그려봅니다.
우리 애들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제 방 타령을 해서 방을 줬더니 밤마다 베개 들고 부부 사이를 파고 들더군요.ㅋ
한동안은 그럴 겁니다. 선생님이 행복해 보여요.^^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선생님은 좀 난감하였겠네요.
젊을 때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