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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안식년을 얻었다 - 윤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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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0건 조회 893회 작성일 19-11-19 16:22

본문

안식년을 얻었다

윤복순

 

흔히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한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올 봄 기다리고 기다리던 외국인 두 명이 포도밭에 일을 하러 왔다. 스무 살의 소녀들이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퇴근할 때마다 문단속 잘 하라고 몇 번씩 일러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스마트폰 번역기로 겨우 소통했다. 5월엔 풀 뽑고 곁순 따기 등 단순한 일이라서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월급을 주었다.

바로 그 날, 남편이 퇴근해 저녁식사 하면서 맥주 두어 잔을 마셨다. 전화가 왔다. 한 아이의 남자친구라며 포도밭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못 하겠다고 해 데리고 갈 거라는 내용이다. 둘이 있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혼자 어떻게 자겠는가. 남편은 술을 해서 데리러 갈 수도 없고.

다음날 평소보다 빨리 출근을 했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당신 딸같이 어제 밤 무서웠지?” 어깨를 토닥이며 돈 벌기가 쉽지 않다고, 장하다고 한마디씩 위로해 주었다. L이 숨죽인 울음을 끅끅 토해내 모두 눈가가 촉촉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

포도밭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 혼자는 못 있어. 너도 갈려면 지금 가. 그래야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다. 친구가 있는데 직장이 없어 놀고 있다고 했다. 포도밭은 알 솎기로 눈코 뜰 새 없을 때였다.

친구는 인천에 있고 데리러만 오면 잘하고 있겠다고 해 개인택시를 보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집도 커 나는 장군이라고 불렀다. 나이도 30대 중반이다. 그래도 세상 물정은 좀 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M이 오고부터 방이 깨끗해졌다고 아주머니들도 좋아했다.

알 솎기가 끝나고 아주머니들은 안 나오고 그녀들만 일을 했다. 착실하게 잘 하고 있어 고마웠다. 옷도 사주고 그들이 좋아하는 통닭도 자주 사 보냈다. 월급을 받으면 10만원만 남기고 모두 자기나라로 부쳤다. 수수료도 아까워 남편이 부치는 걸로 해 면제해 주었다.

M이 친언니는 한국 남자와 결혼해 경기도에 살고 있고, 자기는 이혼한 상태라고 했다. 아들도 있는데 아기는 남편이 맡았고 자기 나라에 있단다. 남동생도 한국에 있다고 했다.

8, 하도 더워 하루 쉬자고 하니 일요일에 쉬겠다고 했다. 일요일 남동생이 바다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단다. 나도 그 생각을 했는데 외국인은 의료보험이 없어 차에 태우고 다니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작년에 밭에서 일하던 외국인들과 같이 점심 먹으러 가다 접촉사고가 났는데 가슴이 철렁했었다. 동생이 구경시켜 준다고 하니 오늘도 쉬고 일요일도 쉬라고 했다.

8월 말부터 출하가 시작되었다. 포도 따기도 포장도 쉽지 않다. 겉으론 잘 익은 것 같아도 햇빛을 덜 받은 쪽은 푸른 기가 있어 상품이 되지 못한다. 큰 송이만 따도 무게를 맞추기가 어려워 큰 것 작은 것 조화롭게 따야한다.

포장은 열과가 있는 가 확인해야 하고, 고개가 꺾인 것 하나만 있어도 당도 때문에 초파리가 생긴다. 그 한 알로 반품되는 일이 생기니 신경이 곤두선다. 무게 맞추기도 힘들다. 그래서 남편의 잔소리도 늘어간다.

9월 초 추석을 앞두고 출하로 최고 바쁠 때다. 여러 번 알려줬는데 그녀들이 또 포도를 잘못 따서 야단을 쳤다. 아주머니들이 이런 실수를 계속했다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1년 농사가 심판받는 때이고 많은 물량이 나가는 때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했다.

월급을 주면서 점심 때 바빠 새참시간에 농협에 가서 부치자고 하니 오늘은 안 부쳐요.” 하더란다. 돈 가지고 있으면 위험할 텐데 하는 생각도 잠시 남편은 일속에 빠졌다.

다음날 출근해 보니 둘 다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짐을 챙겨 나가고 없다. 최고로 바쁜 이때에. “그러니까 왜 혼내.” 남편만 잡도리했다. 그런데 돈을 부치지 않은 걸 보니 남동생이 바다 구경을 시켜 준다고 왔을 때부터 다른 곳으로 움직일 계획을 세운 것 같다. ML까지 데리고 나갔다고 믿는다.

새옹지마가 생각났다.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기르는 말이 도망가고, 준마를 데리고 왔는데, 그이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그래 뭔가 또 다른 행운이 오겠지. 그런데 행운은커녕 악재만 겹쳤다.

추석이 빨라 모든 과일이 최상으로 익지 않았다. 그래서 햇빛이 쨍 나고 일교차가 있어주길 바랬는데, 예년에 없던 가을 태풍으로 10일 넘게 비가 내렸다. 9월 내내 햇빛 난 날이 며칠 되지 않았다. 상품도 최고가 아닐뿐더러 일손도 많이 들어간다. 태풍으로 여기저기 지역축제가 취소 돼 과일의 소비가 많이 줄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경제가 어려워 경기도 없다. 농협에서 주문량도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과 가격이 폭락하니 사과 농가를 도와주자고 나서 포도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남편은 아무래도 올해는 삼재수가 있는가 보단다. 외국인이 가장 바쁠 때 나가고, 출하 철에 비가 주구장창 내리고, 가격도 작년만 못하고. 변방 노인의 아들이 절름발이가 되어 징병을 면하고, 다른 사람 같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로 끝나야 하는데...

남편이 퇴직 후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안식년을 갖고 싶어 했다. 덩치가 크다 보니 농장을 맡길 사람이 없어 지금껏 그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같은 동네에서 포도농사를 하는 김씨 아저씨가 오래 뜸을 들이더니 한 번 해 보겠다고 오늘 답을 보냈다. 남편도 그 사람이라면 포도나무들도 좋아할 거라며 마음을 놓았다.

나도 올해 약국개업 40년이 되었다. 남편은 같이 안식년을 갖자고 한다. 나는 질리게 일을 하지 않았는지 아직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남편이 쉬는 동안 자주 그리고 조금 길게 약국 문을 닫을 생각이다.

올해가 삼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해도 얻지 못한 안식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새옹지마가 맞는 것 같다.

 

2019.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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