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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미군정 49일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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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577회 작성일 22-11-30 14:44

본문


6.25전쟁은 1950년 발발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일입니다

기밀해제 된 미행정부 기말 문서를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 정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6.25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보고 느낀 이들의 <야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해제된 극비 문서와 <야사>가 톱니바퀴 돌아가듯 맞아떨어지면 역사 인식의 경지를 넓히는 계기가 됩니다.

 

<미군정 49일 평양>도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야사>입니다.

1950915일 새벽 5, 맥아더 사령관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은 6.25 발발 3개월만인 9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동부전선은 1010일 원산을 점령했습니다.

피난길에 나선 김일성은 평양을 출발하고 1014일 덕천으로 이동했습니다.

1012일 야심한 시각, 영화촬영소가 있는 <형제산구역> 관사에 도착한 트럭에서 내린 고모가 중국 당동으로 가는 중이라면서 부친에게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날래 타시라요

내레 안 가갔어"

안 가갔으면 우리 집에 가 주시라요

기케 하마

그 당시, 고모부는 외무상이었고, 고모는 조선민주여성동맹 문예부 책임자였습니다. 그래서 부친이 영화 촬영소 건설 책임자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고모와 헤어진 다음날, 우리는 형제산구역에서 평양시청 인근의 고모 집으로 급히 왔습니다.

김일성은 평양 사수를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지는 평온했습니다.

UN군이 평양을 점령하기까지 7일 동안, UN군 폭격도 없었으며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1019, UN군과 국군 1사단 12연대가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 선교리에 도달할 무렵이었던 오전 11시경, 숨어서 대기 중이던 인민군 폭파부대가 인도교, 철교, 수도교를 폭파하고 도주하면서 소규모 전투가 있었지만, 평양시민이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1020, 미제453건설 공병단이 새벽부터 오전까지 부교를 가설했습니다. UN군 도강 이후에도 평양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병사들과 평양시민이 어깨동무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평양은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서쪽은 본평양, 동남쪽은 동평양으로 나눠집니다.

일제말기 조선 총독부 주요시설이 본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이 북조선 심장부였습니다.

본평양 시청 광장 바로 옆, 고모 집은 일본 고위관리가 살던 2층 양옥이었습니다.

정원수와 작은 연못이 있었고, 상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도꼭지를 돌려보던 부친이 바로 이거 야!” 소리를 질렀습니다.

능라도 수도다리 폭파 이후, 본평양 시민은 식수와 생활용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부친이 평양시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날 오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선중앙은행 지폐를 가마니에 담아 소달구지 3대에 싣고 부친이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날부터 무장한 치안대원이 우리 집 보초를 섰습니다.

 

김일성은 한반도가 통일되면 사용하려고 조선중앙은행에 새 지폐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부친이 평양 위수사령관이었던 프랭크 밀번(1892~1962) 소장을 만나려고 시청에 갔을 때, 경계근무 중이던 MP가 가로 막더라고 했습니다.

때마침 통역관이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폭파 된 수도교 복구 문제를 상의하려고 왔다고 말하니까, 통역관이 밀번 소장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밀번 소장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압록강 수풍 발전소에 근무했던 기술자이고, 철골구조물을 설치하는 <한성합명회사> 대표이며, 수도교 복구공사에 필요한 기술자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밀번 소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고, 폐쇄령을 내린 조선중앙은행 돈을 가져가서 공사를 하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밀번 소장은 평양 위수사령관이라서 질서 유지 차원에서 이미 치안대를 만들도록 지시를 내린 바 있었습니다.

평양 시민의 경제 활성화도 모색 중에 있었고, 능라도 수도교 복구공사가 시급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나는 밀번 소장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그 당시 국군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자서전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밀번 소장은 나의 군사적 스승이다. 적의 공격 앞에 궁지에 몰리다가 반격의 기회를 잡기 시작한 낙동강 전선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국군1사단이 미1군단에 배속되면서 나는 낙동강에서는 물론, 평안도 운산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며 후퇴할 때도 그의 지휘를 받았다.”

대구 한 과수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다. 그는 당시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장군이라기보다는 촌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사전에 꼼꼼하게 점검했다. 이것저것 따져본 다음,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그 뒤로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나는 1013. 밀번 소장 포고령 제1호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양을 실효 지배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도 UN 참전국 소속이기 때문에 국군이 선봉에 서서 평양을 탄환 했다고 하더라도 북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1019<평양시정위원회> 사람들이 왔습니다.

6.25전쟁 발발 2년 전부터 이승만 정부가 임명한 관료들이었습니다.

평양시장. 부시장 2. 경찰서장, 소방, 보건, 후생, 사회, 교통, 재정 및 농상, 법무, 문교부 책임자와 행정조직 132명 명단이 대자보로 나붙었습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평양시민을 동원했기 때문에 1027일 이승만 대통령 환영 행사를 시청광장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 까지었습니다.

이승만은 개인 자격으로 평양에 왔습니다.

밀번 소장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양시청 사무실이 텅텅 비어 있는데도 그들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여관 입구에 <평양시정위원회> 간판을 걸고 무위도식 하는 신세였습니다.

은행 돈을 모두 가져 온 부친은 그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부친은 UN결의안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승만이 정치 쇼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유엔 총회가 결의 한 내용, <남한 정부 북한지역 통치 불가>를 재확인 하는 공문을 12일 미국행정부가 서울에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평양에 와서, 북한 주민의 안정과 복지 추진, 질병예방, 생필품 제공, 생산 활동의 조기 복귀 추진, 이북 주민과 관료들 보복을 미연에 차단하고, 미군에 의한 군사법정의 설치 및 북한 화폐의 계속 유통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10세였던 나는 평양시청 군중대회 후미에서, 종군기자가 사진 촬영 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미국 행정부가 이승만에게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라고 지시한 바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평양을 다녀간 다음에도 북한 지역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습니다.

 

경향신문 195018일과 19<평양의 이모저모>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국군이 평양에 진주하자마자 인프라 복구에 힘써, 수돗물이 1110일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며 전기도 20일부터 공급된다고 함.”

평양 시내를 지나는 전차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운행을 하지 못함.”

화폐는 임시적으로 북한 돈과 남한 돈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지만 평양시민들은 남한 돈을 더 환영하며 <조선중앙은행>1120일 현재도 개업하지 않았음.”

경의선 철도는 서울에서 동평양까지 이미 개통되었으며, 평양과 신안주, 평양과 개천, 평양과 진남포 등의 복구공사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2주 정도면 여객수송이 가능하다고 함.”

학교는 아직 개교하지 않았음. 과거 교사들은 대부분 열성 공산당원이라 도망을 가기도 했고, 교재가 없어서 열고 싶어도 열 수 없는 형편임.”

이처럼 평양에서의 인프라 복구가 빠르게 진행 될 수 있었던 것은 - 부친이 조선중앙은행 돈을 적시적소에 나누어주면서 경제 활성화에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다음 회에서는, 19501213일 조선일보 전동천 기자 <대동강변 피난민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영상 - https://url.kr/4miavz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지금까지 구체적 사항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들어본 바도 없는 구체적 내용 기술을 대하니, 제대로 실감되지 않아 멍 할 따름입니다. 너무도 생소한 부분이라서 마치 남의 나라 얘기를 듣는 기분이네요. 어린 시절 경험이라서 그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디에서도 자료를 대했던 적이 없어 더욱 그럴 겁니다.

김춘봉님의 댓글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저의 큰고모부는 광복군 지대장으로 전사하셨고, 현재 대전 현충원 장군묘역에서 고모와 합장, 영면 중이십니다. 
김정숙 빨치산 대원이었던 작은고모는 생사를 모릅니다.
6.25 당시 일본에 계셨던 숙부는 학도병과 함께 맥아더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셨다가 제가 노량진 본동초등학교 재학 중에,
저의 부친과 남대문 시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하셨습니다.  .
그런데 북한에서 활동하는 작은고모 소식을 듣고, 남매 간에 싸워야 하는 현실을 개탄 하시다가  몸에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하셨습니다.
저의 부친도 삶에 의욕을 잃고 괴로워 하시다가 병사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6.25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