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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를 화폭에 담은 피카소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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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아나키스트를 화폭에 담은 피카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586회 작성일 22-12-04 13:40

본문


동영상 – https://url.kr/ai7ezf 

피카소가 그린 <한국전쟁>은 빨갱이가 그린 그림이라는 이유로 피카소 작품은 물론 이름을 언급조차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치적 작품이라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습니다.

201151일부터 829일 동안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서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의 작품 <한국전쟁> 어디에도 미군이 개입한 전쟁으로 추정 할 만 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림 왼쪽과 오른쪽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알몸 여인들과 갑옷 입은 군인들.

고통과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진 두 명의 여인, 체념한 듯 눈을 감은 다른 여인,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소녀, 그들 품으로 달려드는 두 명의 소년과 가슴에 안긴 아이, 밑에서 노는 아이는 모두 알몸이고 무방비 상태입니다.

오른쪽에는 철갑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기계장치 같은 총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피카소의 <한국전쟁>을 볼 때마다 전신이 옥죄는 공포가 가슴을 방망이질 합니다.

전쟁은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나이가 팔순이지만 70년 전 6.25가 할퀴고 간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통증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평양을 출발해서 서울에 도착하니까 2국민방위군소집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원입대로 인원을 충당할 수 없으니까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도를 피해 골목길로 남쪽을 향해 가다가 수원역 인근에서 부친이 불심검문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방위군 소집 연령은 17세부터 40세까지였습니다.

부친은 31세였습니다.

부친이 방위군 소집에 불응하니까, 인솔 장교가 빨갱이라면서 권총을 겨누면서 다가왔습니다.

피카소의 <한국전쟁>을 보는 순간, 그 당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의 부친도 스페인 내전 당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주인공만큼이나 용감한 아나키스트였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들 국가, 종교, 자본과 같은 집단 세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불복종하는 용기 그 자체입니다.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초는 이성(理性)에서 출발합니다.

이성을 통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위기의 순간에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위기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2국민 방위군 소집 당시 불심검문에 걸렸을 때와 부녀자 겁탈을 목적으로 야밤에 침입한 미군 병자들 면전에서, 부친이 담력과 기지를 발휘하면서 모친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14일 후퇴로 다시 남쪽으로 가는 동안, 주요도로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뒷골목을 이용하면서 영등포와 안양을 거쳐 수원역에 도착했을 때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군용 트럭 한대가 있었고, 군인들이 강제로 사내들을 트럭에 태우려고 실랑이를 하는 중에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이 트럭에 오르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군인이 부천의 등을 떠밀려 트럭에 달라고 할 때 부친이 완강하게 뿌리치면서 타지 않으니까

인솔 장교가 다가와서 부친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면서 윽박질렀습니다.

그때 부친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강경했습니다.

내레, 니북에 있으면서도 인민군에 가지 않았소. 인민군에도 안 갔는데 처자식을 길바닥에 두고 갈 것 같습네까? 죽이든지 살리든지 님자들 마음대로 하시라요.”

장교의 입에서도 거친 말이 나왔습니다.

이 새끼 진짜 빨갱이 구나!” 하면서 권총으로 부천에 가슴을 쿡쿡 찔러 됐습니다.

그 바람에 부친은 뒤로 밀리면서 무리와 떨어졌습니다.

부친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두 눈을 감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린 나는 바지에 오줌을 잤습니다.

장교가 군인들을 향해서,

트럭에 타지 않겠다는 놈들은 이쪽으로 보내, 모두 죽여 버리겠어.”

그러자 사내들이 트럭에 타기 시작 했습니다.

모두 트럭에 탄 것을 확인한 장교가 부친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재빨리 트럭 운전석 옆자리에 타고 휭하니 가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다른 가족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19511월 초순,

조치원 시내의 어느 가정집 방 한 칸을 빌려 피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4일 후퇴로 서울을 포기한 UN군은 오산과 평택 지점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2월 중순 경, 최전선으로 투입된 미군 병사들이 조치원 시가지를 활보 하면서 민가에 침입해서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날이 어두워지면 모친 신발부터 챙겼습니다. 머리맡에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야심한 시각, 담을 뛰어넘는 소리가 쿵, , , 3번 들렸습니다.

부친은 재빨리 모친과 옷을 비롯하여 신발을 다락에 밀어 넣고, 나보고 자는 척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방문이 벌컥 열렸을 때 나는 실눈을 뜨고 봤습니다.

흑인병사 둘, 백인병사 한 명이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자는 척하시던 부친이 몸을 뒤척이면서 이불을 걷어찼습니다.

여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동작 되었습니다.

나도 돌아 누우면 자는 척 하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다락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열린 틈으로 모친의 발뒤꿈치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히면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침입자들 시선이 다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무의식 행동이었습니다. 방에 여자가 없다고 생각한 침입자들이 방문을 거칠게 닫고 안채로 갔습니다.

안채 여주인은 낮에 시골 친정으로 가고, 주인 남자와 내 또래 여자아이가 안채에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주인 남자의 , , ,”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여자아이 비명소리도 함께 들려왔습니다.

주인 남자는 미군 병사들에게 제압을 당한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탄식과 신음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나는 안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핑계로 저지른 미군 병사들 만행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날이 밝기 무섭게 우리는 그 집을 나왔습니다.

주인 남자는 대청마루에서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능욕을 당한 여자애는 변소에서 어기적거리면서 안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치원 인근의 어느 암자에서 며칠 있다가 서울 수복 후, 남들보다 먼저 노량진에 왔습니다.

평양 대동강 부교를 건설한 미제453 건설공병단과 평양 능라도 수도다리 복구공사를 한 부친은 업무상 인연이 쌓여 친밀한 관계없습니다.

UN군이 철수할 때 부친은 동평양 선교리에 있다가 그들이 제공한 트럭을 타고 남아 하던 중, 가족을 버리고 갈 수 없었던 부친은 한강철교 복구공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부친은 그들을 만나려고 조치원에서 급히 서울로 되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미제453 건설공병단과 만났습니다.

부친은 한강철교 복구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노량진에 집을 마련하고, 나는 본동초등학교 4학년에 전학했습니다.

1951612, 임시 한강철교 복구공사가 끝났습니다.

귀가한 부친은 미제453공병단과 미8군 사령관이 참석한 개통식에서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고 자랑했습니다.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그때 부친 사진과 자소서에 필요한 여러 장 사진도 찾아냈습니다.

 

그 후, 인생의 고비마다 사색에 잠기던 나는, 시대를 아파하는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기록물에 가설적 견해를 덧붙인 시나리오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설은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론 체계를 연역할 때 필요합니다.

창의적 가설로부터 이론이 도출되고,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면 진리가 됩니다.

창의적 가설은 지식을 확대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도 합니다.

<아나키스트를 화폭에 담은 피카소>는 가설입니다.

비록 가설이지만, <한국전쟁>을 볼 때마다 전신이 옥죄던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피카소는 알몸의 여인들과 무장한 군인을 -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좌우 대칭 1;1 구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임신한 여인들과 아이들이 무장한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이기나 한 번 겨루어보자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 억새풀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생생한 증언과 기술을 통해 모르는 부분에 대한 공부 많이 했습니다. 저도 6.25 일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김춘봉님의 댓글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부친은 북한과 남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느 쪽이 좋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부친은 어느 쪽에도 세뇌 당하지 않았던 아나키스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