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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걷이 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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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675회 작성일 22-12-2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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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전인데


아직 추수 전인데 곳간이 그득하게 채워진 기분이다. 마음이 넉넉해진 때문일까. 지난 목요일(음력 9월11일) 선친(先親)의 기제사 전후로 먹거리가 넘쳐난다. 세 여동생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보내와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매년 부모님 기세사(忌祭祀) 무렵을 비롯해 수시로 다양한 선물을 보내온다. 동생들이라고 해도 일흔을 넘겼거나 예순의 후반에 이른 할머니들이다. 그럼에도 외아들인 오빠 내외가 부모님 기제사를 모시는 게 신경 씌는 지 오랫동안 되풀이 되고 있다.


나는 가족이나 형제들에게 베푸는 데 무척 서툴 뿐 아니라 인색한 편이다. 물질 뿐 아니라 말부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두 누님이나 세 여동생들은 나의 성격에 비해 사뭇 다르다. 평소에 베풀 줄 모르는 나를 탓하거나 흠을 파고들지 않을 뿐더러 기회가 닿을 때마다 뭔가를 주려는 헙헙한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부담스럽다. 그래도 한결같이 생각해 주는 살뜰한 형제들이 있어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모른다. 타고난 투미한 성격 때문인지 빚을 지고 사는 처지임에도 안부 전화마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건강을 이유로 매일 아침식사 메뉴가 ‘삶은 고구마와 계란 각각 1개와 우유 한 잔’으로 바꾼 지 여러 해 지났다. 이런 사정을 매구처럼 꿰뚫고 있던 막내 여동생이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가 주말을 이용해 농사 지은 햇고구마 두 박스를 보내줘 열심히 먹어도 최소한 연말까지 너끈하게 버틸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생고구마가 암 예방을 비롯해 건강에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는 조언에 따라 매일 한 개 정도를 믹서(mixer)에 갈아서 아내와 함께 한 잔씩 마시기 때문에 매우 요긴한 먹거리 중에 하나이다.


우리 내외는 도토리묵과 손 두부를 무척 즐긴다. 이런 기호를 간파하고 있던 셋째 여동생이 직접 쑨 도토리묵과 손 두부를 비롯해 햇밤과 채소 따위를 엄청 많이 보내왔다. 우선 도토리묵은 너무 많이 보내와 절반은 아내가 주위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오찬과 만찬을 도토리묵과 두부로 한껏 즐겼다. 한편 보내온 고춧가루는 내년 이맘때까지 먹을 정도여서 냉장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놓았다. 그런데 셋째 여동생의 도토리묵을 쑤는 재주는 어느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이다.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도토리묵을 먹어봤어도 그녀의 것에 견줄만한 경우를 발견했던 적이 없다. 이는 결코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는 비불외곡(臂不外曲)의 관점이 아닌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이다.


셋째 여동생이 보내준 것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넷째 여동생이 택배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짐 꾸러미를 서둘러 뜯어보니(unboxing) 도토리묵 한 상자와 밤 두 팩(pack)이 들어있었다. 등산 중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도토리를 발견하고 도토리묵을 좋아하는 오빠 내외가 생각나서 주워다가 직접 묵을 쑤어서 한 상자를 보낸 것이란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절반은 남아있어 오늘 점심도 도토리묵을 먹을 참이다. 실제로 오빠 부부라고 해도 자기들에게 베푸는 것도 없음에도 지극 정성을 담은 고마운 선물에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동생들이 뭔가를 보내올 때마다 빚을 지는 기분이지만 그런 마음을 전할 방법이 마땅찮다.


두 여동생이 보내온 밤(栗) 얘기다. 둘은 각각 등산을 갔다가 주워왔다는 얘기였다. 한데, 올해는 밤 풍년인지 얼마 전 허물없는 이웃이 왕방울만한 밤을 한 말(斗) 정도 선물로 주셔서 열심히 먹었어도 아직 한 번 정도 삶아 먹을 양이 남아있다. 여기에다가 이번에 두 여동생이 또 보내와 냉장고 한쪽에 그득하게 쟁여져 있다.


넷째 여동생이 보내온 밤은 두 개의 비닐 팩에 나뉘어있었다. 무심코 하나로 합친 뒤에 아내가 시누이인 여동생과 통화를 하더니 그중에 하나는 찐 밤이고 다른 하나는 날밤(생밤)이라고 얘기하더란다. 깜짝 놀라 펼쳐 봐도 어느 것이 날밤이고 어느 것이 찐 밤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달리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아내와 마주 앉아 찐 밤을 골라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쳐 밤 껍질을 열심히 까도 날밤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내년이면 일흔에 이르는 처지로 치매(癡呆)에 걸린 것도 아닌데 무엇인가 착각을 했던 게 분명하다. 미안해 할까봐 동생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껍질을 까서 보관해 둔 밤이 아직도 냉동실에 그득한데 언제 다 먹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여동생의 착각으로 인해서 밤을 까는데 이틀에 걸쳐 매달려 보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지금 우리 집의 가을은 만석꾼 부자가 부럽지 않을 만큼 풍요롭다. 물질적으로 고구마에 도토리묵을 위시해서 밤과 다양한 채소가 냉장고에 가득함을 이르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피가 섞이지 않은 올케와 여러 시누이들 사이의 깊은 신뢰와 도도한 정이 흐르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 위로는 여든여덟의 큰누님에서 예순여섯의 막내까지 다섯 자매가 올케인 아내와 갈등이나 별 탈 없이 서로를 아끼며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맘은 흐뭇하기 짝이 없다. 저승에서 지켜보실 양친의 미간(眉間)에도 웃음이 번질까.


마산문학, 제46집, 마산문인협회, 2022년 12월 17일

(2022년 10월 10일 월요일)



댓글목록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저희 집에서도 도토리묵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곤 합니다.
아파트 단지 주변 야산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습니다.
아내가 운동을 한답시고 야산을 다녀올 때마다 어김없이 도토리를 주워가지고 옵니다.
여러 번 반복 하니까, ‘티끌 모아 태산’을 실감합니다. 
저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문제는 도토리 껍질 까기입니다. 
삶은 도토리를 말려서 자루에 넣고, 방망이로 두드리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어도,
아파트에서의 방망이질은 민폐라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플라이어’로 한 개 씩 반쪽을 내면, 아내가 껍질을 벗겨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그 작업을 했습니다.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한판암선생님 감사합니다.
매번 제 글을 읽어주시고 좋은 글 달아 주시고,
또  이 공간을 지켜 주셔 꾸준히 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건강하셔 우리들의 지주가 돼 주셔요.

저도 광주 언나가 퇴직하고 산행시 주운 도토리로 묵을 써 주는데
도토리묵 명인이라고 이름 붙혔어요.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의 여형제분들의 띠앗이 대단하네요.  참 부럽습니다. 도토리묵이 집에 그득하다니 그 또한 부럽습니다 ㅎㅎ
도토리묵이 가끔 먹고 싶어서 시중에 파는 걸 먹어보면 영 아니다 싶어서 사다가 버릴 때도 있어요. 누군가 옹골진 정성으로 쑤어 주는 묵을 먹어볼 팔자는 아니라서 선생님의 띠앗이 더 부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건강식 많이 잡수시고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