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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엄동의 초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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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677회 작성일 23-01-1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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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의 초입에서


어젯밤 찬비가 촉촉이 내렸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는 나뭇가지에 간당간당 위태롭게 나부끼던 마른 잎을 모지락스럽게 몽땅 떨궈놓고 제 갈 길로 사라졌다. 한꺼번에 많이 떨어진 낙엽이 산속 등산로에 수북이 쌓여 발길을 옮길 때마다 푹신푹신 밟혀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잎이 모두 졌기 때문에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젖힌 격이라서 숲속이 환하고 밝아져 되레 낯설었다. 마치 어두컴컴했던 세상을 탈출해 밝은 행성에 불시착한 것처럼 얼떨떨했다.


마지막 남아 있던 잎이 우수수 떨어지니 낙목한천의 스산한 풍경이다. 하지만 남녘으로서 아직 수은주가 빙점(氷點) 이하로 내려갔던 적이 없기 때문인가 보다. 늦가을의 정취가 가시지 않고 어른거려 어느 계절인지 당최 헷갈린다. 거무칙칙하게 변색되었을지라도 된서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보이지 않아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잎이 아직 그대로 달려 있다. 또한 우리 동네 일부 도로의 가로수인 은행나무 잎이 샛노란 채 아직도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등산로 입구에 심겨진 하얀 동백 10여 그루는 어쩐 일인지 10월 말쯤에 꽃을 피워 11월말 무렵쯤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면 몽땅 지는데 아직은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며 가을을 지우지 못하고 만추에 머물고 있다.


스무 해를 훌쩍 넘게 같은 동네 뒷산 야트막한 정상(323m)을 매주 대여섯 차례씩 오르내리고 있다. 사계절 모두 나름대로 등산의 맛과 멋이 다르지만 특히 겨울 산행을 선호한다. 청청한 소나무 군락지를 제외하면 모든 수목이 발가벗은 채 엄동설한에 대비하는 결연한 나목(裸木)에서 강인한 결기가 엿보인다. 봄의 화사함이나 여름의 나른함을 비롯해 가을의 달뜬 화려함 같은 부담 없이 청아한 설한풍이 몰아치는 등산길은 언제나 기껍다. 그 길에서 이심(異心)이나 욕심을 내려놓고 자분자분 걸으면서 진솔한 나와 조우하며 적당히 옴츠리고 긴장하는 맛과 멋이 그렇게 흡족할 수 없다.


겨울의 산행은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동네 뒷산일지라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왁자지껄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서 산만해질 개연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겨울에 산을 찾는 등산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차분해지는 분위기가 되레 정겹기 그지없다. 산행에서 뭐 그리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지라도 조용히 생각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동절기의 산행을 선호하며 즐긴다.


설한풍이 나목 가지를 뒤흔들며 윙윙 왈왈대는 등산길은 자연스럽게 잔뜩 긴장하거나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매서운 바람에 손이 곱으면 두 손을 마주잡고 비벼대다가도 얼어터질 듯한 귓불을 감싸며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잡스러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 대신에 정신이 맑아지고 밝아져 되레 그런 상황을 즐기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추위의 훼방에 온 몸을 던져 견뎌내는 인내의 연속인 노정이다. 몰인정할 정도로 혹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설한풍이지만 청아함은 정녕 무엇과도 견줄 수 없어 겨울 산행에 점점 빠져들게 마련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들짐승들의 서식 환경이 점점 더 열악해지는 걸까. 전에는 등산길에서 까치나 까마귀 혹은 꿩 또는 비둘기 따위의 텃새와 고라니 멧돼지 등과 심심치 않게 마주쳤다. 그러나 요즘 겨울엔 기껏해야 딱따구리가 고사목을 쪼아 먹이를 찾는 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다. 여름철엔 먹이가 풍부한 때문인지 철새들이 상당히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이에 견줄 때 겨울 철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텃새나 붙박이 짐승들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는 그들이 다른 삶터로 옮겨 갔거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등산길의 일정 지역에 멧돼지가 밤낮으로 먹이를 찾으려고 땅을 파 헤치면서 자주 출몰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일 년에 몇 차례 흔적을 남기더니 올해는 기껏해야 한두 차례 나타났던 흔적을 남기고 나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멧돼지가 다시 그곳에 돌아왔을 때 먹으라고 등산길을 오가며 길섶에 떨어져 나뒹구는 도토리와 굴밤을 한 말(斗) 이상 주워서 뿌려 놨는데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과연 멧돼지도 영영 사라진 걸까. 


지난 60년대까지 황폐화 되었던 산림이 상전벽해를 떠올릴 만큼 잘 복원되어 무성한 숲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도시를 개발하고 수많은 도로를 사통팔달로 개설했다. 결과적으로는 이동 통로를 비롯해 서식환경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야생 짐승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결과가 아닌지 진지하게 곱씹어 볼 일이다. 등산로에서 각종 조류나 짐승들이 점점 사라져 가니 어쩐지 삭막하고 쓸쓸함은 공연한 감정의 낭비일까.


마산은 겨울에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온화한 지역이다. 따라서 삼동 내내 단 한 차례라도 시내에 눈이 쌓이는 강설은 축복 중에 축복이다. 그래도 이번 겨울엔 눈이 듬뿍 내려 하얀 세상으로 변한 동화 같은 설경을 만끽하는 등산길이 펼쳐졌으면 좋으련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몇 겁(劫)에 걸쳐 덕을 쌓는다면 그런 축복이 내려질 터이다. 따라서 섣부른 기대는 공연한 허욕이며 헛된 꿈이리라.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얽히고설킨 현실의 굴레에서 비켜서서 몇 시간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한 겨울의 등산길에 대한 기대에 설레고 가슴이 마구 나대며 뛴다. 살을 에는 추위와 매서운 칼바람과 맞서며 진정한 나와의 만남이 기대되는 계절이다. 흔히들 건강은 몸의 단련으로 얻을 수 있으며, 행복은 마음을 갈고 닦아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조금 춥다는 핑계로 방구석 아랫목만 파고 듦은 백해무익으로 어디에도 실익이 없기에 나름대로 결기를 다지면서 내뱉는 독백이다.


한맥문학, 2023년 1월호(통권 388호), 2022년 12월 25일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댓글목록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산행에서 뭐 그리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지라도 조용히 생각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동절기의 산행을 선호하며 즐긴다.’는 의미를 곱씹어 봤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는 저야말로, 동절기 산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