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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생-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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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85회 작성일 19-11-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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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생-최재서


인생 오십 고개에 올라서, 그 사이 한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다보면 실오라기만한 외길이 보일 둥 말 둥, 줄거리 잡아 이렇다 할 아무 일도 없다. 나는 인생의 허무와 무가치를 느낀다. 나는 좀더 충실하고, 좀더 가치 있는 생을 체험하고 싶다. 그럴 때에 나는 베토벤의 교향악을 듣고, 혹은 밀턴의 시를 읽고, 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다.

이 글을 읽어 줄 독자는 대개 20 전의 청년임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은 아직 인생의 회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을 내다보며 기쁨과 슬픔을 다같이 희망의 품안에 포옹하면서 전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간혹 문학 작품을 읽어, 인생에 대해서 그 무엇을 반성하게 될 때에,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붓을 든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비교적 현대에 발달한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자주 되풀이된다. 그만큼, 모든 문학 작품이 자연과 인생을 모방하고 반영하여, 현실의 이모저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치 사진기가 풍경이나 인물을 촬영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목적은 좀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 소재를 선택하다가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하고 혹은 다시 결합해서 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학 작품은, 현실적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 세계는 현실 세계와 따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생을 떠나서 예술이 독립할 수는 없다. 예술가는 그의 소재들을 인생 체험 속에서 구해 올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한 천재라면 그 소재들을 결합하고 조직하는 독특한 방법과 원리까지도 자연에서 배워 온다. 그러니까,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해서만 성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현실 세계가 있고, 그 곁에 혹은 그 위에 예술 세계가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하면서도, 독자것인 원리 밑에서 자체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특한 목적을 수행한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한도에서는 기록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 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과 예술면을 가진다. 이 두면 중에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 구비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 예술적인 면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록적인 면만을 말하려 한다.

문학을 현실의 기록으로서 볼 때에,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을 쓴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체험했으며, 또 그 체험을 얼마나 진실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이 성실하게 인생을 실천해 보지 못한 사람의 글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일평생 성실하게 진리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진실한 생활 체험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희귀하다. 우리는 밀턴에게서 그런 희귀한 실례를 본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어린 밀턴은 줄곧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장래에 시인이 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일이 그의 소년 시대의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문학적 소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지도로 특별히 교육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열두 살 이후로 그는 자정 전에 자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명이 불완전하던 그 시대에 어린 사람이 그렇게까지 밤늦도록 공부했다는 것은 건강에 좋았을 리가 없다. 그것은 그가 만년에 실명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면의 덕택으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을 비롯하여 철학, 천문학, 물리학 등의 학문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었다.

밀턴의 대학 시대는 순결한 생활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 믿는 퓨리터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그의 생활 감정이 여러 편의 시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에 밀턴은 목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에 문학으로 전향했다. 그 당시 교회들의 타락을 분개했다는 것도 목사 지망을 단념한 이유의 하나였다. 대학을 나온 뒤에, 그의 앞에 유망한 길이 열려 있었지만,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독서와 시 창작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투철한 신념과 열렬한 정신을 품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밀턴은 더욱 견문을 넓히고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 둘과 상종했고, 또 직접 이탈리아 말로 시를 발표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갇히어 살던 과학자 갈릴레이와 만난 것도 이 때였다. 이 여행 중에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장편 서사시를 쓰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탓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의 해방)과 경쟁해 볼 생각이었다. 전기의 서사시는 16세기 말이 발표되어 근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시로서 온 유럽에 이름이 높았었다.

밀턴도 그런 영국적인 시를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제를 영국 역사에 유명한 아더 왕의 전설에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려 할 때, 본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 있어, 그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왕실과 의회 사이에 계속해 오던 알력이 마침내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그 때의 심정을 밀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포가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쾌락을 위해서 외국에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양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밀턴의 면목이 여기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 밀턴은 형세를 살피면서 여전히 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 때에 그의 머리를 점령했던 문제는 여전히 장편시의 창작이었다. 그 때의 그의 포부는 다음 말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심 노력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일은 나의 팔자라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강한 천품이 결합된다면, 후세 사람들을 위해서,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히 작품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의 계획들을 적은 원고가 99편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경에 관한 것이 66편, 영국 역사에 관한 것이 33편이다.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선택되면서 실락원이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1642년이었다.

바로 이 때에, 교회를 장로제로 고쳐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민주화하려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어 국내가 물끊듯 했다. 밀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팸플릿을 써 가지고 서재에서 나왔다. 그 후 20년 동안, 그 내란에 직접 참가해서 투쟁했다. 여러 해 연구해 오던 그의 장편서는 어찌 되었던가? 물론 포기되었다. 그렇게 알뜰한 그의 시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붓을 꺾는 밀턴이었다. 내란 중에 그는 크롬웰 호민관 밑에서 라틴 말 비서로 있으면서, 국왕 찰스 1세를 단두대로 보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여 온

유럽을 진동시켰다. 그는 그의 온갖 지력과 정력을 바쳐 자유 진영을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는 멀어졌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은 밀턴과 그의 동지자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660년에, 파리에 망명했던 찰스 2세가 다시 영국 왕으로 영접되어, 영국은 왕정으로 복고했다. 혁명 투사들은 모두 붙잡혀서 처단되었고 밀턴도 투옥되었으나 목숨만은 보존되었다. 그의 문학적 재질을 아깝게 생각하는 국왕이 특별히 그를 사해 준 것이다.

이 때에 밀턴의 나이 50, 그는 이상과 더불어 지위와 권세를 잃고, 사면의 적들 속에서 고독과 빈궁에 빠졌다. 그의 가정 생활도 특별히 불행했다. 첫번 결혼에 실패했고, 둘째 번 부인은 사망했고, 그 자신은 완전히 사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다. 실락원에서 밀턴은 암담한 그 자신을,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암흑과 위험과 고독에 둘러싸여'



라고 읊고 있다. "실락원"은 이런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눈먼 늙은 시인이 한 구절 한 구절 구술하는 것을 그의 어린 딸이 받아 쓰면, 그 것을 낭독시키어 틀린 데를 고치고, 이리하여 12권 장편시를 읊어 나가는 장면은 참담하고도 엄숙하였다. 무엇이 맹목의 시인을 몰아서 시를 읊게 했던가? 그것은 그가 젊었을 제 약속했던,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만한 불후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불붙는 열정이었다.

밀턴은 이 작품 속에다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념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특히 왕정 복고 이후에 그가 겪은 가지가지의 쓰라린 감정--실망과 분만, 권세에 대한 반항과, 아첨에 대한 멸시, 하느님의 사명을 다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희한--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를 털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밀턴은 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일생을 살고 싸우고 고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실락원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불후의 작품이 되었다. 밀턴은 양서를 정의하여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길이 전하고자, 대가의 생명 고혈을 향약으로 처리하여 보존한 것'이라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 자신의 책의 성질을 설명한다.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다만, 그런 사상과 감정은 밀턴의 경우에서처럼 성실하고도 열렬한 인생 체험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다. 러스킨은 그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이것을 진실하고도 유익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 아무도 그것을 말한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 그것을 분명하고도 음악적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생을 받아 태양의 혜택을 입음으로 인연해서, 천재일우로 알게 된 참다운 지식이며, 참다운 의견이었다 함을 자각한다. 그는 그것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새겨 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 나머지는 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미워했다. 나의 인생은 수증기처럼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나의 눈으로 보았고, 나의 마음으로 알았다. 나에게서 그 무엇이 가치 있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들이 기억해 줄만한 가치 있는 나의 일부다.」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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