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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그 시간/조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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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25회 작성일 19-12-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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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그 시간
                      조성원
 

 

 

가는 날이 잠시 모름하다 했더니 어느 참 날씨가 확 바뀌었다. 차가운 기운이 가슴에 닿는다. 추분이 바로 눈앞이다. 이쯤 비로소 찬기를 머금은 과일이 맛이 들고 곡식이 여문다. 며칠 더하면 가슴 벅찬 오르가슴 그 계절의 절정에 닿으리라.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초가을의 산행 길은 그야말로 달콤한 꿀맛이다. 온기에 내가 익고 찬기에 내가 여문다. 그것도 오후 5시 반의 시각쯤은 더 할 나위 없는 시간의 촌지이다. 삶을 일깨우는 공짜 촌지의 맛을 그렇게 고소하게 즐긴다. 녹녹한 몸에 짭조름한 땀 냄새가 달기만한 이쯤은 열기와 찬기가 더 이상 엉기지 않는 시점으로써 서편이 물들기 시작하는 바로 또 그때다.
 

바람도 잠시 멈춘 저녁뜸이란 이쯤의 순순한 때에 나는 무한한 애착을 갖는다. 굳이 붉게 타 내려오는 산자락 맵시를 살포시 엿보는 산행 끝이 아니라 해도 초가을 오후 5시 반이라면 가슴에 닿는 느낌의 것을 애무하듯 만져보고 싶고 염원한다. 누런 들녘이 그러하고 살져가는 과일이그러하며살갑게닿는바람이또그러하다. 결실이 눈앞에 있다.
 

특히 이쯤 황혼은 입 안에 스르르 단맛이 고일 정도로 곱다. 여름 밤 황혼을 바라보며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을 연상한다면 이 어린 시간의 고운 자태는 영락없는 새색시의 발그레한 볼이다. 찾아든 어둠은 으슥하지 않으며 농염하지 않다. 늦가을은 너무도 방긋하여 낙조의 꽃을 연상할 것이지만 이즈음은 흡사 꽃망울을 막 짊어진 것 같은 기대가 숨 쉰다. 그렇게서서히엷게물들이다가는어느순간낚싯줄에고기걸리듯톡하고땅거미가진다.
 

물들자마자 순식간에 닿는 겨울날의 황혼과는 견줄 것이 아니다. 화해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꽃망울이 흐르는 듯 말머리가 트일 것만 같다. 황혼이 해찰을 하는 시간에서의 물드는 상념은 이제 막 시작이다.
그 시절은 그 무엇의 느낌으로 살았을까. 추억은 아니더라도 휑하니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어쩌면 이쯤이 좋은 것은 어린 때부터였을지 모른다. 막 밥에 뜸이 들던 시각이 바로 이때였다. 어머니는 석유풍로의 다 닳은 심지를 올릴 만큼 올려서 그어 댄 성냥불 끝을 빙빙 돌려 겨우 불을 살렸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 냄새에 빈 배는 그야말로 땅거미처럼 푹 꺼진다. 나는 늘 그렇게 어머니의 그 따스함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그 촌지의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이 시각을 꼬박 정시에 알려 준다. 가만 생각해 보면 5시 반은 비단 초가을뿐 아니라 어느 때고 늘 초가을의 느낌으로 산다. 일이 여물고 매듭을 지으려 할 때가 바로 이 시각이며 꾸벅꾸벅 졸다가도 총기가 다시 피는 것도 또 이때다.
 

명암은 어차피 어긋남 없이 그 누구도 교차한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다. 그러기에 어둠이 채 여물지 않은 이 시각의 분위기는 누구나 소망하는 머물고 싶은 그 어디쯤 삶의 배경은 아닐까. 총기와 권태 그리고 반목이 허물어지는 이 시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의 끝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과일의 맛이 들고 곡식이 여무는 때처럼 이 시각은 명암과 냉온이 교차하는 명치끝으로서 달보드레한 붉은 여백이 분명 있다. 격론을 펼치든 흥정을 하든 어느 누구든 슬슬 일을 접고 말을 아낀다. 화해는 아닐지라도 내일의 여지가 있다.
아등바등하는 것들이 그 정도에서 끝이 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혹여 그러한 것이 배고픔을 숱하게 인식하였던 소싯적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아니 그 목마름이 아닐까.
분명히 어머니의 느낌이 그 안에 있다. 배가 고프면 왜 자연 이 나이에도 집과 어머니가 사르르 떠올려지는가. 이 시각엔 누구든 바쁘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 하루를 어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숙제만 대부분 남는다. 이 시각처럼 생각을 많이 하는 때도 없다. 내일은 어찌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각이며 또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어둠을 생각해 봐야만 하는 시각이다. 냉온과 명암의 구별로서 조금은 철이 든 것 같은 5시 반 이쯤의 시각.
 

문득 이 시각이 지금의 내 나이가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이 시각의 저물지 않은 기대로서 내일을 또 맞는 것인가. 많은 것들이 곱다 여겨지는이쯤이라면여전한삶의기대라해두고싶다. 여물어가는 삶의 풍경이 좋고 그 동화 속에 머무는 상념이 그윽하여 그저 고맙다. 하루의일과가매듭을짓는마음으로기우는것이또좋으며그렇게이시각엔그기대감으로여전히배가고프다. 그러기에 나는 이쯤 머무는 상념으로 선선히 매듭을 자근자근 풀며 살고 싶다. 이왕이면 초가을 날로 해서 그렇게.
 

_조성원 수필집 오후 다섯 시 반’(해드림) 중에서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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