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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그 살아가던 이야기/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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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2회 작성일 19-12-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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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그 살아가던 이야기
김은미
 

 

 

 

12월이다. ‘12하면 언제나 먼저 연상되는 게 겨울이다. 요즘 아무리 봄처럼 포근한 이상기온이라지만, 그래도 12월이라는 달력을 보면서 제일 먼저 겨울이네.” 했다.
겨울. 가난한 서민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계절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 예전에는 제법 산다 하는 집도 역시 녹록치 않은 계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울이라면 언제나 따스함을 느낀다. 조금만 다가서도 그 끈끈함에 짜증스러운 여름과는 달리, 겨드랑이에 디밀어지는 곁의 사람의(그것이 친구이건 가족이건) 손의 감촉이 정겹게 느껴지는, 늘 누군가와 바짝 붙어 서고만 싶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만원 버스의 복닥거림조차도 겨울엔 싫지 않았었으니까. 그런 겨울이 달력 한 장 달랑 남기고 성큼 다가왔다. 내게는 어제까지는 늦가을이었고 오늘에야 비로소 겨울이 된 것이다.
 

우리 집의 월동 준비는 요강에 덮개를 씌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집안의 화장실이라는 건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 집집이 윗목 한 귀퉁이에 요강이라는 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기로 만들어 멋진 꽃무늬 있는 요강도 있었고, 쨍쨍 소리 나는 놋쇠 요강도 있었고, 막 새로 나온 스테인리스 요강도 있었다. 어른 남자들은 무릎을 꿇고 쉬를 했고, 사내아이들은 서서 기세 좋게 오줌발을 쏘다가 곁으로 흘러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여자들이 요강에 앉았다 일어나면 엉덩이에 모두 둥근 자국이 뱄다. 딸이 둘인 우리 집은, 밤에 자다가 징징거리는 소리에 깬 부모님이 우리를 요강에 앉혔을 때 그 차가움에 오르르 진저리치는 것이 못내 안쓰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무슨 일에나 솜씨 좋으신 아버지는 국방색 군용 담요를 오려내어 요강에 덮개를 해 씌우셨다. 위아래를 박아 고무줄 넣고는 요강에 씌우는 건데, 거기에 앉으면 선뜩한 차가움도 없었고 엉덩이가 배겨 아프지도 않아 좋았다. 다만, 잠결에 엉거주춤 앉았다가는 오줌발이 옆으로 새 덮개를 적셔놓기 일쑤였다. 그래서 덮개는 여러 개였고, 어떤 때는 하룻밤에 서너 개의 덮개가 필요하기도 했었다.
 

그다음에 아버지가 하신 겨울준비는 어린이 마스크를 만드시는 일이었다. 약방에서 파는 마스크는 죄다 어른을 위한 것이라 나와 동생의 얼굴에는 턱없이 컸다. 그래서 아버지는 얇은 거즈를 차곡차곡 접어 여러 겹으로 하여 양옆을 박고는 거기에 또 좁게 박아 만든 긴 줄을 끼워 우리 얼굴에 여러 차례 대보시며 딱 맞게 매듭을 하셨다. 당시에는 정말 추워서 문밖에만 나서면 금세 턱이 얼얼하게 얼어들어왔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나쁜 공기를 막는다거나 하는 용도가 아닌, 어디까지나 얼굴 보온 차원에서 그 마스크가 쓰였던 것이다. 나와 동생이 마스크를 하고 아장아장 동네 마실 나가면 아이들이 죄다 부러워하며 우리를 빙 둘러서서 보았다. 한 번만 해보자는 아이도 있었다. 언제나 인심이 좋은 나는 덜컥 다른 아이에게 그걸 줘놓고 들어와 밤이면 아버지더러 다시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마스크도 여러 개여서 빨랫줄에 꽝꽝 얼어 조르르 널려 있던 그 작은 마스크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밤에 변소에 가려면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빨간 내복을 입은 몸으로 이불을 벗겨 내면 어둠 속에서 이불과 내복 사이 정전기가 번쩍번쩍 튀어 몸이 따가웠다. 그 위에 두꺼운 털 스웨터를 걸치고 몸을 잔뜩 구부리고 방을 나선다. 그 추위라니! 여간하게 마렵지 않으면 나갈 엄두도 못 내었는데, 왜 추울 땐 밤똥이 그리 자주 마려운지 몰랐다.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거기를 가로질러 가려면 참 먼 것 같았다. 삐꺽거리는 변소 문을 열면 알전구 희미한 빛에 구석구석이 시커먼데, 우리 집은 변소 뒤에 연탄을 쌓아뒀던 터라 덜덜 떨면서 잠깬 서툰 걸음으로 휘청거렸다간 영락없이 연탄 검댕을 묻히기 일쑤였다. 널빤지 아래 구멍을 내려다보면 꽝꽝 얼어 탑처럼 뾰족하게 쌓인 똥 더미와 그것이 지어내는 그림자가 무서웠고, 그래서 애써 그 꼭대기를 피해보려고 엉덩이를 옆으로 삐딱하게 두다가 그만 발판 위에 똥을 떨어뜨리고는 했다. 아침에 그걸 발견한 어머니는 큰소리로 야단을 치시며 더운물 떠다가 붓고 빗자루로 박박 문질러 닦아 내리셨는데, 그러면 그 나무판자 바닥에 얼음이 얼어 대낮에도 벽 짚고 조심조심 들어가지 않으면 훌러덩 미끄러질 판이었다. 미끄러지면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낮에도 변소에 가기가 무서웠다. 겨울에 제일 곤란한 게 바로 변소 출입이 아니었나 싶다.
 

겨울엔 뜨끈뜨끈한 아랫목이 최고다. 밤에 아버지가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아랫목은 우리 차지였다. 어머니는 항상 문께 앉아 콩을 고르고 바느질을 하셨고, 나와 동생은 아랫목에서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누워 데굴거렸다. 아랫목엔 늘 누런 종이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지글거리는 그곳이 불기에 까맣게 타서 나달나달 벗겨져 흙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게 종이테이프를 붙여둬야 했다. 셀로판테이프는 끈적끈적 금세 녹았기 때문에 아버지 회사에서 쓰는 미제 종이테이프로 붙여뒀는데, 그건 우리 양말에도 달라붙지 않고 정말 좋았다. 이불을 오래 덮어둔 채 있으면 이불마저도 누렇게 타곤 했다. 거기에 코를 대면 누룽지 냄새가 나서 나는 걸핏하면 이불에 코를 처박았다. 그런데 아랫목만 뜨끈뜨끈 거렸을 뿐, 비교적 구들이 잘 놓였다고 이웃 아줌마들이 손바닥으로 여기저기 쓸어 짚으면서 부러워하던 우리 집도 윗목은 영 냉골이었다. 그 귀퉁이에 놓인 요강은, 한겨울이면 오줌이 꽝꽝 얼어서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뜨거운 물 부어 녹여야 요강을 부실 수 있었다.
 

겨울만 되면 우리 집 빨랫줄엔 긴 실타래가 널렸다. 끝에 고드름이 생겨 얼었다 녹았다 여러 날 동안 말려야 했던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작아진 털옷들을 걸상을 뉘어놓고 그 다리에 빙 둘러 감아 풀어낸 것으로서, 꼬불꼬불한 그것들을 뜨거운 물에 살짝 삶아내어 그렇게 널어 말리는 것이었다. 다 말린 실은 다시 공처럼 감아야 하는데, 그때 팔 벌리고 실감개에 동참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로, 세상에 그 노역처럼 지겨운 게 또 있을까 싶었다. 팔은 아파 죽겠고, 바깥에서 동무들 뛰노는 소리는 들리고, 때로는 하염없이 졸리기도 하고, 그렇게 팔에 실타래를 걸어놓고 있으면 오줌은 왜 그리 자주 마렵고 여기저기 가려운 데는 왜 그리 많던지. 몸을 배배 꼬면서 방바닥에 펼쳐놓은 책을 읽느라 정신을 팔다 보면, 어머니는 때때로 소리를 질러 팔을 바로 하고 있으라고 야단을 치셨다.
어머니 손에 쥔 실공뭉치는 분명히 커지는데 내 팔에 걸어둔 실타래는 어째 도통 줄어들 기미는 뵈지 않던지. 그래도 털실은 낫다. 겨울 이불 꿰매느라고 무명실을 감을라치면, 그 가는 실은 생전 줄어들 줄 몰라 정말 온몸이 배배 꼬이고 팔이며 어깨에는 알이 배겼다. 때로 어머니더러 실타래를 꿰고 계시라고, 내가 감겠노라고 고집을 피워 역할을 바꾸기도 했지만, 내 작은 손에 그 실공은 터무니없이 큰 데다 동그랗고 예쁘게 감는 것도 기술인지 아무리 해도 한쪽으로 씰그러진 짱구밖에 만들지 못하여 결국 다시 어머니께 빼앗기고 말았다. 팔을 척 늘어뜨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실이 엉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꿀밤 한 대 맞고 울먹이며 쉴 새 없이 코를 들이마셨다. 어머니 옆에는 지직거리는 라디오가 커다란 배터리를 고무줄로 친친동여매고 앉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토해내고,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린 나는 내용도 모르고 그 빠른 말투에 낄낄 웃어댔다. 그렇게 내 인내의 결과로 방안 여기저기 온갖 빛깔의 실공이 굴러다니면 어머니는 그것을 모아 또 조금 자란 우리의 치수에 맞춰가며 새 옷을 뜨셨다.
실을 감을 때야 지긋지긋했지만, 옷을 뜨시는 어머니 옆에서 자투리 실로 흉내를 내던 재미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 당시 겨울이면 아이들 누구에게나 있었던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뜨개질 거리 위에 척하니 얹힐 때까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고개를 숙인 채 열중했다. 한참 짜다 보면 어느새 코 하나 늘거나 줄어들기 일쑤였고, 그래 투덜대며 다시 풀어내는 것도 사실은 즐거움이었다. 드디어 완성이 되어 다 짜인 옷을 입고 바깥에 나가면 얇은 무명 홑저고리에 역시 무명 목도리나 둘둘 감고 있던 아이들은 부러워서 뱅 둘러 모이곤 했다. 그렇게 우리가 입던 털실 옷을 계옷이라 했던가. 정확한 낱말을 모르겠는데, 한자인지 우리말인지, 왜 그렇게 불렀는지도 또한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의 우리는 윗도리뿐 아니라 바지도 계옷을 많이 떠 입었으며 여학생들 속바지도 그런 계옷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여기저기 뜨개질이 유행처럼 번져 그걸 배우려고 많은 엄마가 문화강좌나 털실 가게에 가 앉아 있는 모양인데, 예전 우리네 어머니들은 옷본 하나 없이 온 식구들 옷을 겨울마다 만드셨다. 노란 백열전구 아래 앉아서 하염없이 뜨개바늘을 놀리던 어머니 모습이 참 그리워지는 요즈막이다.
 

어머니가 저녁을 지으실 때면 나는 으레 부뚜막에 가 앉았다. 뜨끈뜨끈한 부뚜막에 앉아 어머니가 만드시는 반찬을 조금씩 얻어먹기도 하고, 부엌 흙바닥에 앉아 있는 멍멍이 메리를 놀리느라 공중에 뜬 발을 까불리기도 했다.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바깥에서 눈싸움이며 눈사람 만들기에 골몰하다 아랫도리를 흠뻑 적셔오기 마련이어서 부뚜막에 앉아 있다 보면 내 몸 여기저기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커먼 가마솥에서는 감자 냄새, 밥 냄새가 기분 좋게 퍼져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집은 식구도 많지 않은데 어째 가마솥에다 밥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며칠 만에 한 번씩 밥을 짓는 것도 아니요 분명히 하루 한 번 하면서도 그 가마솥을 쓰다니. 하긴 당시에는 우리 같은 어린애 밥그릇도, 어른 것처럼 큰 것은 아니지만, 모양은 똑같은 주발이었다. 김치도 한 보시기 가득 채워오면 상을 내갈 때는 국물만 남은 빈 보시기였다. 밥을 짓고 난 가마솥에서 누룽지를 긁어먹고, 그러고도 남는 것엔 물을 부어 또 끓여 숭늉을 마시고, 그렇게 매일 가마솥을 비웠던 것을 보면 참 어마어마하게 먹어댄 모양이다. 하긴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진리를 숭상하던 힘든 시절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때는 비만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으니 많이 먹는다고 살이 찌는 건 분명히 아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먹는 것 이상으로 부지런히도 굴었고, 또한 먹는 게 온통 채소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밥 냄새 가득한 부엌, 밥알이 붙은 커다란 감자, 선반 아래 갓 출산한 어미 개와 눈도 안 뜬 강아지들, 숭숭 썰어놓고 남은 커다란 김치 꽁지, 눋내 내가며 말라가던 내 바지 엉덩이, 소매 걷어붙이고 분주한 어머니의 빨갛게 튼 팔목, 가끔 지나가서 나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하던, 당시에는 우리 부엌의 당당한 식구에 분명하던 쥐들부엌문 바깥은 하얗게 메마른 겨울이었지만 김이 뽀얀 부엌은 마음도 몸도 훈훈한 고향이었다.
 

겨울마다 아버지는 쉬는 날엔 연을 만들어주셨다. 생판 날릴 줄 모르는 내 졸림에 한 주일에 서너 개는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그걸 가지고 나가 동네 오빠들한테 쥐어 주고는 연싸움에서 이겨 보이라고 주문을 하곤 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이 손놀림이 좋은 내 아버지가 만든 연은 근방에서 제일 예쁘고 높이 날아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아버지는 나무토막을 가져와 윷을 깎으셨다. 어른들 한 손으로는 네 자루 모아 쥐기도 어려운 크고 굵은 윷도 깎으셨고, 내가 동무들과 가지고 놀기 좋으라고 작고 귀여운 윷도 깎아주셨다. 그 즈음이면 1년 내내 뒤꼍에 세워져 있던 널빤지도 내다가 반짝반짝하게 닦고 결이 밀려 가시가 돋은 부분은 대패로 밀기도 하셨다. 땅바닥에 닿아 있어 세 계절을 지내는 동안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곳도 깨끗이 밀어내어 손을 봤다. 그것은 내가 뛰어놀 널이었다. 장작 몇 개 가마니에 둘둘 싸 가운데 놓고 턱 하니 그 널을 걸쳐놓으면 금세 신나는 널뛰기를 할 수 있었다. 내 아버지가 준비해주신 내 널이지만 사실 어린 나는 함부로 뛸 수가 없어 동네 언니들이 좋아한 그들의 놀잇감이었다. 언니들은 돌아가며 내 손을 쥐고 뛰어주고, 그리고 자기들도 놀았다. 쿵덕 쿵덕 널뛰던 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사철 모두 두부 장수는 다녔을 텐데 나는 왜 겨울만 생각이 날까. 딸랑딸랑 두부 방울 들리면 어머니는 소리쳐 나를 부르셨다. 무겁고 따끈한 솜이불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그 방울 소리를 듣다가 기어이 불려나가 어머니가 주신 십 원짜리 동전을 들고 삐그덕!’ 빗장 벗겨 문을 열고 아저씨를 부르면 지게에 높다랗게 두부 모판 쌓아서 지고 가던 아저씨가 지게를 세워 끝이 둘로 갈라진 작대기를 받혀놓고 나를 기다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두부 한 모 받아든 손이 금세 물기에 얼어 곱았다. 어머니는 두부 한 모퉁이 끊어 냉큼 내 입에 넣어주셨다. 고소한 두부는 일찍 자리에서 불려나가 앵돌아진 어린 마음을 풀어주었다. 지금은 아무리 옛날식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런 맛을 볼 수가 없다. 그 두부가 숭숭 썰려 담겨 있던 된장찌개, 김치찌개에 아침을 먹었다.
 

행주로 상을 치고 올려놓은 그릇들이 방으로 가져오는 동안 상 위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굴러다녀 제자리에 놓인 적이 드물었다. 꽉 짠 행주의 물기가 그렇게 금방 얼어붙었던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아랫목에 묻어두었던 아버지 주발과 양은 밥통 속에서 막 퍼낸 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 방안이어도 입김이 허옇게 기어 나왔다. 입을 델 것 같은 두부를 한 점 떠서 넣고 입안에서 뱅뱅 돌리며 먹는 아침밥은, 지금 빵 쪼가리 몇 개에 우유 한 잔으론 댈 것도 아니다. 그렇게 뜨끈하고 든든하게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어른들은 일하러, 어린 우리는 놀러.
 

어머니가 떠다 주신 뜨거운 물에 푸카푸카 세수를 하면 어머니는 뒤에서 에리를 접어 안으로 넣어주시며 목도 닦으라고 하셨다. 그때는 목을 닦기가 왜 그리 싫었던지. 이빨 닦는 것도 큰일이었다. 굵은 소금으로 문지르면 잇몸이 아팠다. 치약으로 닦으려면 박하향 화한 향긋한 치약 냄새가 자꾸 나를 유혹하여 문질러 닦기 전에 쪽쪽 빨아먹었다. 막 세수를 끝내고 아무리 꼼꼼하게 물기를 닦았어도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 달라붙었다. 억지로 떼면 손끝이 쓰라릴 때도 있었다. 옆집 언니가 그 문고리에 혀를 댔다가 혀가 갈라졌다고 입을 벌려 보였는데,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살짝 댔다가 얼른 물러났다. 아플 것 같아 끝내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양철 지붕을 타고 내려온 고드름. 빨랫줄에 널린 계옷 소매에서 자란 고드름. 우리는 그것을 꺾어 아이스께끼라며 쪽쪽 빨아먹었고, 칼싸움을 했다. 유리처럼 말갛게 투명한 것도 있었고 반투명으로 뿌연 것도 있었다. 어째서 고드름 빛깔이 그렇게 다른 건지는 지금도 모른다. 하여튼 해마다 보는 고드름이요 해마다 꺾어 노는 고드름이지만 매번 신기했다. 제일 긴 고드름을 찾아 꺾으면 몹시도 으스댔다. 내가 사는 우리 마을엔 지금도 고드름이 많이 달린다. 하지만, 그것이 절로 녹아 흐르다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꺾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장난감이 너무 많으니까, 그리고 시골 골목에 아이들이 없으니까. 나는 그리움에 맺혀 열심히 목을 꺾고 그 고드름들을 올려다본다.
 

좌 앙!’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굴뚝 쑤시는 아저씨가 멋지게 팔을 휘둘러 징을 때리는 소리다. 그 소리만 나면 나는 얼른 창에 코를 대고 내다봤다. 반질반질한 징과는 반대로 온통 검댕 투성이 굴뚝 청소부는 기다란 줄같이 생긴 굵은 철사에 촘촘하게 가시 박힌 쑤시개를 둘둘 말아 어깨에 멨다. 그것으로 막힌 굴뚝을 쑤셔 뚫는다 했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굴뚝 청소를 시킨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내 기억에 우리 동네 누구도 돈을 주고 굴뚝 청소를 한 적이 없는데도 굴뚝 아저씨는 겨울만 되면 나타나 징을 멋들어지게 울렸다. 나는 제발 누군가 그 아저씨를 불러주기만 기다렸다. 굴뚝 청소를 하는 게 보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이 다 지나가 버렸다.
 

연탄을 나르다 보면 떨어뜨려 깨뜨리는 적도 있고 또 혼자서 저절로 깨지는 것도 있었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모아두었다가 연탄 찍는 사람이 오면 동네는 분주해졌다. 이 집 저 집에서 열심히 불렀다. 꼭 연탄처럼 생긴 틀을 가지고 아저씨는 들어와서 깨진 연탄을 그 속에 담고 위에서 꾸욱 눌렀다. 그러면 신기하게 멀쩡한 연탄이 그 아래로 쏘옥 나오는 것이다. 연탄 공장에서도 그렇게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그 많은 연탄을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기계로 찍는다고 했다. 나는 공장에서 연탄을 찍는 것이 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까진가 내가 지나다니는 길에 연탄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꼬불탕 양철 담 위로 산처럼 쌓인 석탄가루는 보일지언정 아무리 문가에서 기웃거려도 연탄 찍는 기계는 보이지 않아 끝내 그 바람은 바람으로만 끝나 버렸다. 나는 지금도 한 번 그 기계가 연탄을 찍어내는 것을 보고 싶다.
 

또한, 누구나가 기억하는,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목소리. 그 구성진 목소리는 언제나 오밤중에 났기 때문에 어린 내가 볼일은 없었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한 번 사주신 적이 있었는데, 방안에 있던 나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학생인지 알 수 없었고, 맛도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내가 직접 그 찹쌀떡 아저씨를 불러 돈을 내서 메밀묵과 찹쌀떡을 산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그때는 이미 찹쌀떡 아저씨에의 호기심이 다 가신 후였다. 다만, 어둔 밤을 처량하게 울리던 그 리드미컬한 음성만은 지금도 듣고 싶다. “메밀묵 사 아려, 찹쌀 떠억!” 또한 겨울밤이면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 여름밤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더위 속에서 잠을 설치며 두런두런 얘기로 보내던 여름밤엔 아마 미처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심지어는 내리는 눈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겨울밤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딱따기 소리는, 그들이 과연 어떤 차림새일지 궁금했는데도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다. 딱따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자지 않고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속닥거리면 어머니는 망태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그래서 내 상상 속에서 망태 할아버지와 야경꾼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겨울엔 거지들도 많았다. 너덜거려 입으나 마나 한 옷 사이로 벌건 살에 때가 덕지덕지 앉은 것이 빤히 보이는 거지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꼭 깡통을 팔에 걸고 다녔는데, 누리끼리한 밥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 퍼먹었다. 반찬도 없이 그 찬밥을 먹는 거지들이 가여워 눈물이 났다. 그리고 미친 사람도 많았다. 다른 때도 있었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꼭 추운 겨울날의 그들만 박혀 있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 때에 전 보퉁이를 꽉 그러안고 벙긋벙긋 웃으며 돌아다녔다. 이렇게 추운데 저리 찢어진 옷을 입고서도 웃기만 하는 그 사람들이 참으로 신기했다. 우리 꼬마들은 그이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웃고 놀리고 돌멩이를 던졌다. 그래도 그들은 웃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나왔다. 나는 그들이 너무 불쌍해서 동무들 뒤에 멀찌감치 서서 바라만 봤다.
 

12월이다. 겨울이다. 나는 또 어김없이 어린 날 겨울을 헤매는 행사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도 모질게 추웠던 기억과는 사뭇 다르게 현실에서 우리 집 마당엔 아직도 파란 풀들이 드문드문 돋아 있다. 옆집 마당엔 어처구니없게도 계절 모르는 장미마저 피어 있다. 이제 다시는 겨울다운 겨울은 오지 않을 것인가. 예수가 태어난 곳에 눈이 펑펑 내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방송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읍사무소 마당에 있는 나무에도 반짝이 등을 달았다. 사람들은 눈이 내리지 않아 스키를 타러 가기 어렵다고 투덜댄다. 그래, 내 아이의 겨울은 반짝이 등과 캐럴과 선물과 스키장으로의 긴 자동차 행렬로만 가득하여, 그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런 풍요로움을 또한 그립게 추억하고 있겠지. 그러나 과연 기온의 푸근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따끈했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요강 덮개 대신에 전기의 온기가 들어오는 비데의 따끈함으로 벗은 엉덩이가 시리지 않은 실내 화장실에서 어떤 행복을 절절이 느끼고 있을지. 예전 사람인 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풍요로움과 행복을 동일시한 우리에 의해서 이 아이들은 당연한 행운 때문에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껴야 할 따사로움을 빼앗긴 것은 아닐는지.
 

_수필집<7080> 중에서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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