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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비 오는 날-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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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24회 작성일 19-11-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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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비 오는 날



1.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 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 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 거지를 알고 있었다. 그 날 그는 외톨이였고 빗물이 철철 흐르는 보도블록 위에 철썩 앉아 있는 그의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하체가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손으론 비닐우산을 펴들어 머리를 빗발로부터 가리고 한 손은 연방 행인을 향해 한 푼만 보태 달라고 휘젓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앉아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는 것도 봤고, 앉아서 다니기 편하게 손에다 슬리퍼를 꿰고 있는 것도 봤지만 그게 반드시 앉은뱅이란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허름한 바지 속의 양다리는 실해 보였고 아마 아침엔 걸어 나와 온종일 저렇게 흉물을 떨다가 밤이면 멀쩡하니 털고 일어나 걸어 들어가겠거니 하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아 빠졌달까, 닳아 빠졌달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날도 물론 그가 앉은뱅이란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앉은뱅이가 아니란 증거 또한 없었다. 그냥 빗속의 모습의 충격적으로 무참했다. 찬 빗물에 잠긴 누더기 속의 하체가 죽어 있는 물건처럼 보였고 그래서 행인을 향해 휘젓고 있는 한쪽 손이 비현실적이리만치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순간 무참한 느낌으로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곤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 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아있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그 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 작용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장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2.버스 바닥에 흩어진 동전



이것도 비 오는 날 얘기다. 버스를 타고 있었다. 타고 내린 많은 사람들의 젖은 신발과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로 버스 바닥은 질펀한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내릴 정거장을 하나 앞두고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 불안해졌다. 잔돈이 하나도 없고 오백 원짜리 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오백 원 권은 그가 처음 탄생할 때 지녔던 가치를 어느 틈에 오천 원 권한테 빼앗기고 형편없이 타락한 건 사실이다. 오백 원 권을 가지고 큰 돈 대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나는 아직도 버스에서 내릴 때 오백 원 권을 낼 때만은 그게 큰돈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차장 아가씨한테 미안해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 옛날 옛적 오백 원 권이 위풍당당하게 최고액 권 행세를 하던 시절, 그것으로 버스 요금을 내면 차장이 짜증을 내며 구박까지 하던 때의 기억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백 원 권으로 요금을 내려면 한 정거장쯤 미리 앉은 자리에서 차장한테 가는 걸 내 나름의 예절로 삼아 왔다. 그 날도 나는 미리 차장 아가씨한테 가서 미안한 얼굴을 하며 오백 원 권을 내밀려고 했다. 그런데 차장 아가씨는 꼿꼿이 선 채 머리만 약간 창틀에 기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 집 셋째 딸만한 나이의 연약한 아가씨였다. 짙은 피로가 앳된 얼굴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 측은했다. 그 잘난 오백 원 권 때문에 이 아가씨의 다디단 잠을 깨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녀의 피곤하고 불안한 낮잠에서 그녀의 중노동, 불량한 생활환경, 불결한 잠자리, 조악한 식사, 업주로부터의 인간 이하의 모욕적인 대접, 그리고 그녀가 도망친 가난한 농촌 등 버스 차장이란 직업에 대해 갖고 있던 일반적이고 알량한 상식을 한꺼번에 확인한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얼싸안고 내 품에 편히 재우고 싶으리만큼 감상주의에 흠뻑 젖어들었다.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고 버스가 멎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반짝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게 그녀가 아니라 나였던 것처럼 나는 놀리면서 어설프게 오백 원 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동전이 짤랑대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백 원짜리와 십 원짜리 동전을 건네주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런 우리의 주고받음 사이를 뚫고 두어 명의 승객이 버스를 내렸다. 그 바람에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게 동전이 질퍽질퍽한 버스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주우려고 엎드리면서 차장 아가씨가 상냥하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같이 줍든지, 그냥 내리라고 하고는 새로운 거스름돈을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발까지 구르며 나에게 호통을 쳤다.

"아이 속상해. 그것 하나 제대로 못 받고 속을 썩여, 빨리 빨리 주워 가지고 내려욧. 빨리 발차시켜야 한단 말예욧."

질퍽한 버스 바닥의 동전은 용용 죽겠지 하는 듯이 차고 희게 빛나며 좀처럼 주워지지를 않았다. 마치 침으로 붙인 우표딱지 모양 버스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나를 약 올렸다. 나는 거지처럼 헐벗은 버스 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손톱으로 이리저리 집어 겨우 백 원짜리 동전만 주워 가지고 허리를 좀 펴려는데 차장 아가씨가 나를 잽싸게 문 밖으로 떠밀었다. 아니 내던졌다.

나는 곤두박질을 치면서 겨우 진창에 엎어지는 것만은 면했다. 그것만으로 내가 받은 수모가 부족했던지 버스는 흙탕물까지 나에게 끼얹어 주고 떠나갔다.

옷도 옷이지만 네 닢의 동전을 주워 올린 내 손과 손톱 사이는 말이 아니게 더러웠다. 나는 어느 가겟집 홈통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로 손을 씻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차장 아가씨한테 몹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꼿꼿이 선 채 불안하고도 달게 자던 소녀에 대한 한 가닥 모성애 같은 게 그 때까지도 내 내부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3.철거되는 대학 건물



또 비 오는 날이었다. 또 버스 간 속이었다. 나는 돈암동 쪽에서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오고 있었다. 버스가 조용한 대학로로 접어들었다. 비 오는 날, 그 곳의 가로수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연둣빛 어린잎들이 신기한리만치 정갈하고 싱그러워, 덩달아서 살아 있다는 게 그저 고맙고 축복스럽게 여겨졌다.

젖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문리대 건물이 보였다. 철거 작업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벽은 그대로 서 있는데 지붕과 내부가 헐어져 뻥 뚫린 창으로 저편 하늘이 보였다. 아아, 드디어, 문리대가 철거당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는 현실감보다는 달콤한 감상이 더 짙었다.

나는 문리대 자리에 아파트가 선다는 소식도, 이를 반대하는 쪽의 서울대 보존 운동에 대한 소식도 남이 아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었다. 그냥 담담한 방관자의 입장이었다. 학문과 사상의 전당이요,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의 고장인 유서 깊은 건물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게 못마땅했지만 아무리 떠들어도 종당에는 그렇게 되고 말걸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로가 이루고 있는 풍경 외에 어떤 딴 풍경도 그곳에서 바꿔 놓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곳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풍경의 고장이었다.

또 내 자식이거나 손자이거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곳에서 입학식을 갖고 졸업식을 가졌으면 하고 벼르던 누구나의 희망이 고장이기도 했다.

아아, 마침내 헐리는구나, 나는 신음처럼 되뇌이었지만 축축이 내리는 비 때문일까, 좀처럼 현실감을 가지고 그 문제가 나에게 다가오진 않았다. 나무들은 다 제 자리에 청청하게 서 있고, 시계탑도 보였다. 버스가 정문을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낯설은 게 보였다. 아마 건설 회사의 현장 사무소 같았다. 일자형의 흰 건물에 함석지붕이 짙고 독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아,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신음했다. 나는 평생 그렇게 독하고 추악한 주황색을 본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그 주황색은 비에 젖어 번들대고 있었다.

그 주황색이 내 뇌를 갈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나는 내 뇌수에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나는 그런 충격은 청각의 자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독한 쇳소리의 마찰음을 들었을 때 뇌 속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황색 지붕 너머로 미래의 아파트 단지의 투시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비로소 문리대가 헐리고 속악하고 호사스러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는 현실감이 나에게 왔다. 그 현실감은 고약하고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지금도 그 빗속에 번들대던 주황색 지붕을 생각하면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진다.

그 혐오감은 유서 깊고 자랑스럽던 대학 자리에 호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과도 일치하는 혐오감이다.



4.소도구로 쓰인 결혼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 날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 그 풍취가 전연 다르다. 빗속에 바라보는 봄의 농촌은 싱그럽고 산뜻하고 흥겨워 보였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 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 새 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백 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 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과자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나중에는 한 푼 보태 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개별적으로 승객 한 사람 한사람에게 구걸 시작했다. 차마 거지라고 부를 수 없게 의젓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경우 단정한 옷차림이란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보탬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를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보이는 거나를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내 앞에 그가 오거든 그게 뭔가 똑똑히 봐 두리라 벼르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관대의 사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걸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 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 년 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 하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 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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