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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황금기를 돌아봄/한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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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38회 작성일 19-12-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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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황금기를 돌아봄
 
 
 
 
 

사흘
전인 경인년 오월의 스무 번째 날은 우리 대학이 예순네 번째 맞았던 개교기념일이었다. 그날 ‘30년 근속 공로패’를 수여 받았다. 사람이 신실하게 살면서 주어진 일에 열성을 다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격려와 위로를 받은 셈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다른 분야에 비해 뒤늦게 출발한다는 특성 때문에 서른 해를 재직했다면 젊음과 열정을 앞세워 일생을 모두 불태운 꼴인 관계로 시각에 따라서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서른다섯의 봄에 월영 언덕(우리 대학이 월영동 산비탈 언덕에 있음에 연유하여 부르는 별칭임)과 연을 맺어 올해로 31년째가 되며 내년 봄이면 정년을 맞아 정든 캠퍼스와 별리(別離)가 불가피하다. 이런 이면의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정서를 고려할 때 장기근속을 치하하는 패를 받으며 느끼는 감회는 사뭇 각별했다.
 
백 년 전쯤에 우리 사회에서 보내고 받았던 서간문의 거개가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하는 식으로 시작했다. 정말 세월은 흐르는 물같이 지나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첫발을 내딛던 그 해에 새로 신설된 학과(전자계산학과 : 현재의 컴퓨터공학부 전신임)에 입학했던 제자들이 어느덧 지천명을 넘긴 사회 중견이 되었다. 그런 그들의 아들딸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을 졸업시켰거나 교육하고 있을 현실의 소회를 염두에 두고 드러내는 견해이다.
 
십 대 중반에 접어든 풋내기 전임강사는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설익고 덜 여물어 무늬만 그럴듯하게 포장한 채로 무모한 의욕만 앞세웠기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모양새처럼 위태위태했으리라. 그렇게 사리를 이치에 걸맞게 챙기지 못하는 주제이기에 내가 아는 것에 모르는 것까지 주저리주저리 주워섬기며 매몰차게 몰아세우는 만용을 부리며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어쭙잖은 객기가 하늘을 찔렀기에 60명 정도가 듣는 강의에서 39명인가를 낙제 점수(F)를 주는 횡포를 부렸지 싶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넌더리날 정도로 냉혹하게 다그쳤음에도 견뎌내며 따르던 올곧았던 젊은 지성들이 진정으로 고맙다. 한편, 현실과 타협의 여지없이 밀어붙이면서 잡다한 불협화음이 심심치 않게 튀어 미덥지 못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신설학과 운영을 비롯하여 대학 정보화의 막중한 임무를 지워 놓았음에도 한발 물러서서 넌지시 넘겨다보며 일관된 믿음을 전제로 기다려 주었던 학교 당국에 고마울 따름이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으며 원하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교만과 오기로 똘똘 뭉쳐 물불을 가리지 않던 시절의 듬성듬성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모자라는 재능이나 경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세포 동물처럼 앞으로 치닫는 게 만사형통이라고 여겼던 때문에 원했던 결실을 거두었가 하면 반대로 쓰디쓰면서도 처절한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이 같은 상반된 냉탕과 온탕을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성숙의 참뜻을 깨우치면서 터득하는 보람도 있었다. 당시 끓어오르는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갈시킬 요량으로 집필했던 전자계산학개론(현재 컴퓨터개론으로 개정 증보됨)을 비롯한 몇 권의 저서 출간하여 널리 사랑을 받았던 기억은 지금 회상해도 흐뭇한가 하면 달콤한 열매였다. 하지만, 뚜렷이 내세울 연구 업적이나 학문의 흐름을 주도할 논문을 쓰지 못했음은 무능을 스스로 증명한 징표 같아 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고픈 충동을 잠재울 길이 없다.
 
나는 진정한 학자이며 참된 교수였을까. 아무리 후하게 스스로 평해도 고개가 외로 돌아간다. 지금 고백하지만 지난 서른 한 해 동안 녹을 받으면서 절반 정도의 세월은 학교 운영에 관련되는 끄트머리 자리를 줄기차게 꿰차고 보직이라는 이름으로 아등바등했다. 원래 본바탕의 됨됨이가 유능하고 존경받을 학자가 될 재목이 아닌데다가 학문적 노력 또한 겨우 체면치레할 정도인 주제였던 나이다. 그러므로 본말이 뒤바뀐 외도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으며 거기다가 탁월한 연구 성과의 기대는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게 진솔한 양심에 따른 고백이 될 것이다. 열린 자세와 정직성을 밑바탕으로 진실을 향한 겸허한 태도를 유지할 때, 훌륭한 학자이며 교수의 자리에 다가갈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진리를 외면하면서 다부진 각오나 진지한 노력도 없이 낯간지럽게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한다며 애써 변명하던 내 모습이 몹시 낯설 뿐 아니라 어설프게 회상된다.
 
누구나 자격과 조건을 갖춘다면 교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초임으로 겨우 첫발을 내딛는 햇병아리 전임강사가 신설되는 학과의 ‘창설 교수(founder)’가 되는 영광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 행운이 내게 내려져 학과를 만들어 가면서 첫 입학생을 졸업시켜 사회로 내보내는 것을 필두로 서른한 해 동안 학과가 발전하는 양양한 모습과 격동기에 숨 가쁘게 변화하는 순간을 직접 몸으로 겪으며 학과의 역사를 증명할 산증인이 된 셈이다. 영겁의 세월에 비해서 찰나에 지나지 않을 짧은 지난 세월임에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여 내 작은 가슴속에 살아 숨 쉬니 여간 흐뭇한 게 아니며 무척 자랑스럽다.
 
나라는 재목에 비해 분에 넘치는 일터에서 누린 지난 세월의 삶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누구나 겪으며 지나게 마련인 질곡의 아픔도 빼놓지 않고 경험했다. 지난 82년 여름휴가 때 경부고속도로 금강 유원지 다리(제2 금강교)에서 고속버스가 추락하여 일가족 모두가 당했던 교통사고가 그 중 하나였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86년 봄에는 아내가 큰 병을 얻어 서울에서 두 달간이나 입원하여 수술을 여러 번 하는 변고까지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자기 삶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방임으로 키웠던 두 아이가 아직도 방황한다. 자신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희생이 따르더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 문제에 대처해야 옳았다는 회한이 짓눌러 켕긴다. 지금은 만시지탄의 회한이 절절하지만 지난 일을 되돌릴 수 있는 묘책이 없기에 죄다 내 업보로 여기는데도 마음은 천근만근이다.
 
흔히들 대학의 정교수는 ‘학생이 알 수 있는 것만을 골라서 가르친다.’라고 비아냥댄다. 이는 오랫동안 대학에 몸담아왔던 교수일수록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는 데는 게으르기 한이 없으며 학생들의 비위나 맞추어 어정쩡한 강의를 하면서 현실에 타협을 서슴지 않는다고 비꼬는 조롱이며 풍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처럼 서릿발같이 예리하게 날 선 경고를 슬기롭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유구무언이 제격이지 싶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학문의 실체를 터득하여 열성을 기울여야 할 시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금단의 열매 쪽에 매혹되어 엄연한 본령인 학문에 소홀하지 않았던 가 짚어봐야 할 일이다.
 
세상에서 힘(권세)은 덧없게 마련이고 인간의 집착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고 이른다. 또한, 오르거나 다다르지 못할 헛된 꿈 때문에 내려놓지 못한 탐욕은 저승에서까지 화를 부르게 마련이라는 충고이다. 따라서 인간 세상 어디에도 영원하고 완벽한 부귀영화가 없음은 자명하다. 이 같은 하늘의 이치를 일찍이 깨우치고 주어진 학문에 열성을 다했다면 지금쯤 후회나 회한이 없는 회상의 만보(漫步)를 마냥 즐기는 여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 삶의 전부였던 캠퍼스에서 생활이 아직은 한 학기 더 남아있다. 그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정체성을 차근차근 캐가며 아울러 올곧은 길을 걸었는지 냉엄하게 고민해보련다.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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